학생인권조례에 관한 여론이 뜨겁다. 시마다 제각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싶다. 두발, 복장의 자율, 언어 체벌까지 금지하는 등 학교를 완전 성지로 만들어 가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가 성지의 주인인지 누가 성지의 순례자인지 이제는 분간하기 어렵게 된 것은 아닌 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학생을 위한 제반 조치가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방향 제시라는 면에서 좋은 인상을 풍기는 것도 있지만, 학생의 사고와 틀을 교복과 두발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에는 생각의 여지를 갖게 한다. 학교는 학교다워야 한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동시에 교사는 교사다워야 한다. 이런 등식이 오랜 옛날부터 학부모의 마음에 인식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학생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인테넷에 일본의 교복이라고 메뉴를 올려 보면 일본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때 교복이 일본의 잔재였다고 폐지된 적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문제점이 발생해 다시 원상회복되었다. 학생이 학생으로서 위상을 바로 정립시키고 학생이 교사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는 것은 교복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교복은 내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나가는 학생 나름대로 잣대를 가지는 것이다.
한국의 교사가 학생을 때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한국의 문화가 서당 문화의 폐습으로 본다면 그것은 서당 문화의 바른 면을 보지 못한 결과다. 서당 교육은 교육의 올바른 길은 바른 정신, 바른 자세를 갖게 하는 척도로써 작용한 것이다. 오늘날 교육이 학생들에게 체벌도 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도 공손하게 해야 한다. 두발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 교육의 뚜렷한 잣대도 없이 탁상행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교육에는 나라마다 지향하는 방향이 있다. 일본에는 군국주의 교육의 전통이 있고, 미국에는 실용주의 교육의 뿌리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교육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조 서당 교육의 뿌리는 없는가?
교사가 학생을 잘못 지도할 때에는 준엄한 징계가 있어야 한다. 반면 학생이 교권에 도전하는 자세가 있을 때에는 엄히 다스려야 한다. 이런 공조가 없는 오늘의 학생 조례는 학교 교육의 파행을 더욱 부채질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교육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한국의 전통을 지켜가는 마지막 보루다. 학교가 유행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를 거듭할 때 교육의 장은 흔들린다. 흔들리는 교육은 배우는 자에게 지식의 점진적인 소양을 불어넣기보다는 사회에 따르지 못하고 퇴행하는 장소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변화를 주는 지식 경쟁의 시대에 학교의 시장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성급한 논리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학교는 지식의 축적을 통해 변화되는 시대를 바로 보고 새롭게 재정립시켜 오늘에 맞게 적응시켜 갈 수 있도록 하는 장이다. 시대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학교는 시대의 변화를 배우는 곳이다. 그러기에 학교는 변화되는 시대에 나타나는 다양한 요소들을 새롭게 재조명하여 새롭게 적응할 방도를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학생인권 조례에 한마디 덧붙이고자 한다면 학교 현장의 교육에서 지금 무엇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무엇이 덜 필요한 것인지 그것부터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인권조례를 제정하였다고 하여 학교의 변화에 새로운 전환점이 나타난다는 것을 예상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겉치레에 지나질 않을 지. 현장을 지켜가는 한 교사는 의문만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