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돌아보는 교단 50년 (35)

2011.03.14 09:57:00

우리가 번 돈 이예요. 빼앗지 마세요.

1977년의 봄은 유난히도 빨리 찾아 왔었다. 지난 겨울에도 별다른 추위가 없이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수북하게 쌓일 만큼 눈다운 눈이 내린 적도 없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어서 봄이 되어도 파란 싹들이 제대로 돋아나기나 할 것인지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내 비가 내리지 않은 들판은 봄이 되자 얼었던 것이 녹으면서 온통 먼지만 풀썩거리는 사막과도 같았다. 벌써 물이 고이고 못자리를 할 준비를 해야 할 논바닥은 허옇게 메말라 있고, 쟁기질을 하는 논에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논바닥이 요 모양일 때 밭에 심은 보리나 밀은 자라지 못해서 앙당하게 퍼지기만 하고 키가 자라지 못하였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 전에 보리밭에 풀을 매고 북을 주어서 보리 뿌리를 튼튼하게 해주는 작업을 할 때에도 온통 먼지가 날려서 허옇게 흙먼지를 덮어써야만 하였다.

하긴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는 다른 해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편이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보리를 심은 논에 물기가 많아서 보리가 물손(물기가 많아 해를 입어 죽어 가는 일)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논이 바짝 말라서 밭처럼 고슬고슬하기 때문에 논에 심은 보리는 오히려 아주 잘 자라 주었다. 농부들은 이런 논보리에 정성을 쏟아서 보리 고랑을 쳐 올려서 보리 논 두둑에 뿌려주는 북주기에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논보리는 다른 해보다 훨씬 더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3월이 되고 4월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비가 오겠지, 오겠지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못자리를 해야 할 때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정부에서도 걱정이 되어서 각 마을별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라고 권하였다. 물대기가 편하고 물을 끌어 올 수 있는 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서 모를 기를 수 있게 한 곳에 못자리를 만들면 물이 부족하더라도 한 곳에만 대기 때문에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양수기나 저수지, 댐이 지금처럼 물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을 사람들이 시냇가에 집중적으로 공동 못자리를 만들었지만, 가뭄이 계속 되자 그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5월도 중순이 되었건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시내의 바닥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의 모들이나마 말라비틀어지지 않게 지켜보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이처럼 가뭄에 시달리는 농촌을 돕기 위해 어린이들까지 나서서 가뭄극복을 위해 노력 봉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까지 들판에 나가서 못자리에 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시내 바닥에 고인 물을 세수 대야나 양동이로 길러다가 말라 비틀어져 가는 못자리에 뿌려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자가 물을 떠서 가지고 가서 못자리에 뿌리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까 앞의 아이들이 뿌리고 간 자리만 다시 뿌리기도 하고 좁은 논둑길을 오가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점차로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물을 퍼서 올려 보내면 이어받기를 해서 못자리에 가면 차례로 받아서 뿌려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일은 좀 더 효과적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논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썩거리고 메마른 논바닥의 열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한 평의 못자리라도 더 살려 보자고 우리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물을 퍼 날랐고, 못자리는 조금씩 파랗게 생기를 되찾았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우리 못자리도 좀 해줘요”하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들도 있는 힘을 다해서 해보자고는 하지만 어린 우리들이 땀이 비 오듯 흘리면서 먼지투성이가 되어갔다. 이렇게 애를 써서 물을 퍼 나르는 모습을 보고 차마 시킬 수가 없었던지 학교 옆의 일부만을 하고는 계속할  수 없다고 다음으로 미루고 해서 하루 두 시간씩만 물대기 작업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동안에 이미 온 몸은 흙투성이가 되고 땀에 흠뻑 젖어서 옷까지 흙투성이가 되곤 하였다.

어린 우리들까지 나서서 못자리 살리기를 하게 되자, 마을의 어른들도 더 이상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였다. 냇가를 파고 물을 퍼 올려서 못자리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게 되었다. 점차 마른못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못자리의 모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여서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학교에 우물을 파도록 교육청에서 지원이 나와서 학교 마당에 구멍을 뚫고 우물을 판 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우물물을 멀리에 있는 곳까지 끌어가서 못자리를 살리는 데 이용하니 학교 부근의 논들은 우선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이젠 이 들판에 모내기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였다. 온 들판을 가득 매운 보리를 베어 내어야만 모를 심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보리 베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 가뭄 극복에 힘을 쏟느라고 보리 베기를 할 손이 모자란 농촌의 일손을 돕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 무렵만 해도 농촌의 학교에서는 보리 베기나 모내기시기에 맞춰서 농번기 휴가라는 것을 하여 우리 같은 어린이들도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돕게 했었다. 그렇지만 올해 같은 때는 농번기 휴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뭄 극복과 보리 베기, 모내기라는 일이 한꺼번에 해야 하는 농촌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여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 졌다.



보리는 벼와 달리 나란히 베지 않아도 탈곡기에 그냥 쓸어 넣어서 털 수 있는 곡식이다. 우리들 같은 어린이들의 손으로 베어도 탈곡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른들처럼 품삯을 다 받을 수는 없지만, 일부만 받고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한 푼도 안 받는다면 너도나도 해 달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다 해주지도 못하고 갈등만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우리는 논의 보리를 베러 가야 했다.

처음에 나가서 보리를 베려니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집에서 소먹일 풀을 베어 보기는 하였지만, 보리를 베어 보지 않았던 어린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베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다. 몸을 다치지 않게 주의할 점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첫날 논에 나가서 조금씩 일을 익혔다. 어른들은 한 마지기(약 300평)를 베는데 300원을 받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200원만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첫날 약 3000 평을 베었다. 물론 하루 종일이 아니고 오전 공부가 끝나고 나서 오후에만 하여서 많이 벨 수가 없었다. 하루에 우리가 번 돈이 2000원이 되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에 학급회를 열어서 이 돈을 쓸 곳을 의논하였다.

“우리 이 돈을 모아서 가을 수학여행을 가면 어떻겠어요,”

반장인 경수의 의견은 우리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수학여행을 가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건대요?”

역시 계산에 밝은 영호의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갈 수학여행지에 따라 달라지고, 며칠 동안을 갈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우리 고장의 도시에 2박3일 정도로 간다면 약 3000원 정도면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렇다면 우리들이 돈을 모아서 수학여행을 갔다 올 수 있게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들이 모은 돈으로 수학여행을 가도록 하려면 우리 모두 열심히 보리 베기를 해야 한다고 다짐까지 하였다. 그래서 의논을 마친 그 날부터 우리는 아침 시간만 공부를 하고 나서 낫을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첫날 우리가 3000평을 베어서 2000원을 벌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쓸 돈을 저축하기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우리들을 장난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혹시 누가 게으름을 피우면 우리 스스로가 “야 ! 명직이 넌 혼자만 편하길 바래? 누군 허리 안 아프고 힘 안 들겠어?”하고 꾸짖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서곤 하였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래도 너무 힘들게 하지는 말아라. 무엇보다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들하고, 알았지?”하고 우리들을 격려 해주시기도 하고, 선생님이 앞장을 서셔서 일을 해나가셨다.

아무리 우리가 잘해보려고 해도 선생님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보리논의 한 두둑씩을 맡아서 베어 나갔다. 자기 몫을 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끝나도록 좀 쉴 수도 있다. 그러나 일찍 끝난 남자아이들은 이런 일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여자아이들이 아직 저 만큼 베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쉬고만 있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남은 여자아이가 베어 오는 두둑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서 베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힘껏 벤 덕분에 우리는 처음 시작한 다음날이자 우리가 보리 베기 삯으로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자고 결정을 한 첫날에는 논 7200평을 베어서 하루에 4800원을 벌었다. 일이 끝나고 오후 5시가 거의 되어서 선생님은 오늘 한일을 반성해보는 자리를 가졌다.

“자, 오늘 우리가 벤 보리논의 모습을 보아라. 저기 언덕에서부터 여가까지 우리 학교 전체 면적보다도 두 배는 될 만큼 많은 논을 우리가 모두 베었구나. 오늘 품삯까지 합하면 벌써 두 사람 몫은 벌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모두 “와 !”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좋아했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렇게 수학여행 비용이 착착 저금되고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힘 드는 줄을 몰랐다. 힘든 일을 하였으면서도, 우리들은 신바람이 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자랑스럽게 오늘 우리가 한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우리가 논 7200평을 베어서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기도 하지만, 우리가 번 돈으로 수학여행 비용으로 하기로 했는데 오늘까지 두 사람 몫을 더 벌었다고 하셨어요. 우리 열심히 일해서 집안일도 돕고 수학여행 비용도 벌 거예요.”
“너희들이 힘든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구나. 몸살이라도 나면 안 된다. 너무 애쓰지 말아라.”
“에이, 경미가 언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애예요. 보나마나 꾀나 부리고 제일 꼴찌를 하고 있을 텐데 몸살이 날 까닭이 있어요?”
“에이, 오빠, 또 날 어린애로 봐. 만날 그런 오빤 뭐 잘하는 게 있어?”
“요게? 또 나를 무시하고 덤벼? 너 한 대 얻어맞아 볼래?”
“에이, 넌 오빠가 되가지고 동생을 그렇게 놀리고 그러냐? 좀 듬직 해봐라. 그러니까 동생이 널 무시하려는 거 아니냐?”

저녁을 먹은 나는 지쳤는지 금세 잠이 몰려 왔다.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벌써 어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경미가 아주 지쳤구나. 오늘 학교에 갈 수는 있겠니? 그렇게 힘이 들어서 며칠이나 견딜까? 아무래도 걱정이다. 어서 씻고 오너라. 밥 먹자”하시면서, 나를 깨워주신 것이었다.

나는 환한 아침 햇살을 보면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뛰어 나갔다. 마음속으로 ‘아차 늦었구나. 서둘러야겠는데’하면서 서둘러 세수를 하고, 들어가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아버지가 갈아서 잘 싸놓은 낫을 가방에 꽂고 나서 집을 나섰다.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네가 지금 학교 가는 거니? 논에 보리 베러 가는 거지?”

물론 하루 종일 일을 하게 될 것이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일이니 그것도 학교 공부라고 생각하니까 논에 일하러 나가는 것도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아침 인사를 나누는 교실의 분위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밝고 신이 난 것이었다.

“그래, 어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힘들었지? 혹시 몸살이 난 사람은 없을까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너희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나온 걸 보니까 정말 반갑구나. 힘들었지?”
“네에,”

우리들의 목소리는 힘차고 밝았다. 
“너희들 그렇게 힘든 일을 한 아이들 같지 않구나. 정말 괜찮은 거니?”
“네에.”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신 선생님의 표정은 환하게 웃어 주시고 계셨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많은 논을 베어 치웠기 때문에 오늘은 쉬네 부락 부근으로 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제 보다 더 많은 논을 베어 달라고 신청이 들어 왔는데, 너희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할 수 있는데 까지 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 오늘은 30마지기를 베어 버릴 거예요.”
“까르르”
"야, 명식이 ! 너 혼자서 30 마지기를 벨 거라고?”
아이들은 모두 “와 !”하고 웃음으로 즐거운 한 바탕을 만들었다.
“오늘 베어 달라고 신청을 한 논이 꼭 30 마지기이거든. 그럼 그걸 정말 다 벨 수 있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누가 시킨 것도 의논을 한 것도 아니지만 모두 한결 같이 “다 벨 거예요”하고 합창을 하였다. 정말 우리는 그 많은 논을 다 벨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첫째 시간을 공부하는 동안도 아이들은 논에 가서 일하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힘든 일을 하기 싫다는 아이는 없었다. 어서 나가서 오늘 베기로 한 30마지기를 다 베자는 생각들 뿐이었다.

첫째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은 “난 이제 교무실에 가서 오늘 작업을 나간다고 신고를 해야 하거든, 너희들은 낫 조심하고 작업 준비들을 갖추고 운동장에 나가서 모여 있거라”하신다. 우리들은 마치 소풍을 나가는 아이들만큼이나 신바람이 나서 “와! 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들 하였다.

물론 작업을 하면 늘 꼴찌를 하는 몸이 약한 성애 같은 아이들은 기가 죽어서 아이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이렇게 야단인데 혼자서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또 논에 나가면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데, 공연히 아이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서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낫을 챙겨 들고 목에 수건을 질끈 묶은 아이도 있었고, 작은 수건을 허리춤에 찬 아이도 있었다.

“야 ! 문식이 넌 아주 마당쇠 같다. 마당쇠!”
정근이가 문식이를 놀리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리어
“예이, 무엇을 할 깝쇼 마님!”
하며, 마당쇠 흉내를 내어서 온 교실이 한 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우리들이 운동장에 줄을 지어 모여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 선생님과 함께 교장선생님께서 함께 나오셔서 우리에게로 오셨다. 선생님이 반장에게 눈짓을 하자 반장이 “차렷, 교장 선생님께 경례!”하고 경례를 하자 다시 돌아서서
“열중 쉬어!”하자 교장선생님은 “험, 험”하시면서 목을 가다듬고서 “너희들이 작업을 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께 잘 들었다. 우리 고장의 일손을 돕고 너희들이 결정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낫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까 우선 다치지 않게 조심들 해야 한다. 너무 욕심을 부려서 일을 하다가 몸살이 나거나 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조심들 해야 한다. 자 열심히 해라.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고, 알았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예"하고 대답을 하였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곧장 출발을 하여서 쉬내 동네 부근으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나갔다. 교실 보다 덥고 먼지가 풀썩이기는 하지만 들판을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우리들은 마치 적군을 물리치러 나선 국군처럼 씩씩하고 용감하였다. 오늘 하루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우린 기절을 하고 말았을는지도 모른다. 9000평이라는 면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전체의 면적이 3000평 남짓 밖에 되지 않으면 그 세 배나 되는 넓은 면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일을 하는 요령도 생겼고, 일을 잘 하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익숙하게 보리를 베어 젖히는 것을 본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이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논의 주인 되시는 장수동 이장님은 우리들에게 “아직 어리고 공부해야할 너희들에게 이런 일을 시킨 것은 미안하다. 그러나 이왕 일을 하러 나왔으면 어른들에게 욕먹지 않게 깨끗하게 일을 해주어야 하는 거야. 너희들도 모두 우리 고장의 아이들이고, 농사를 짓는 집의 자녀들이니까 모두 내 집의 일이다 하고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하고, 말씀을 하시고 나서 선생님께 따로 부탁을 하시면서 조금 후에 새참을 준비해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마을로 돌아 가셨다.

우리들은 각자의 옷이나 도시락을 모아서 더워지지 않게 잘 덮어서 햇볕을 가려 놓은 뒤에 각자 한 두둑씩 일을 맡았다. 아무래도 힘이 약하고 일이 서투른 여자들에게는 귀퉁이의 두둑이 짧은 것을 맡기고 남자들은 한 가운데 두둑이 긴 것들을 맡았다. 요즘처럼 논이 반듯하게 농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아무리 부잣집의 논이라도 모두 비뚤비뚤 땅 모양이 생긴 대로 둑을 지어 만든 논들이었다. 그래서 논에 심은 보리의 두둑은 모두 그 길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 그 부근에 있는 여러 논의 보리를 베어야 하였으므로, 남자들은 서로 두둑이 길고 보리가 잘 자란 것을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끝날 수 있고, 다른 아이들보다 잘 하는 아이들이 더 많이 베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일을 시작 해보자. 너희들이 지치면 안 되니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 때 까지 열심히 베고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잠시 쉬어 가지고 다시 시작하도록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선생님은 말씀을 마치자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어 주셨다.



우리들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힘차게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모두 자기가 맡은 논 두둑에 덤벼들어서 보리를 베기 시작하였다. 모두들 어찌나 열심히 베는지 말소리 하나 나지 않고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처럼 사그락사그락 보리들이 베어져 눕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생님이 맡은 두둑의 길이가 가장 길지만 선생님도 만만찮은 솜씨로 보리를 베어 나가시기 때문에 따라 붙은 사람은 형주와 문섭이 뿐이었다. 두 아이는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집에 가면 어른 몫을 한다고 소문이 난 일꾼들이다.

우리들이 사는 곳은 읍내에서도 40리가 되는 면 소재지에서도 또 십리 길을 더 들어와야 하는 산골 마을이다. 오죽 했으면 정부에서 지정한 벽지(교통이 불편하고 뒤진 고장)로 지정을 받은 고장이었다. 그래서 하루네 4번씩 다니는 버스가 생긴 것도 몇 년이 되지 않고 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큰 장을 보려면 삼십리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런 일은 결혼 같은 큰 잔치나 있어야 마차를 동원하여 함께 보는 그런 고장이다. 그래서 이 고장의 아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농촌에서 집안의 일을 도와 가면서 자랐기 때문에 대부분이 어느 정도의 농사일을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일단 보리 베기가 시작되자 들판은 사그락 거리는 낫질 소리만 들려오고 우리들의 이마에는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가 손등이며 발들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더위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들은 이마의 땀을 쓱 팔뚝으로 문지르고 만다. 그러면 팔뚝에 묻은 흙먼지가 이마에 굵은 줄을 그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옆의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히죽거리는 것이었다.

내 왼쪽 곁에 두둑을 맡은 영임이가 오른쪽에서 베던 승희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보이자 승희는 힘이 들어서 주저앉으면서
“왜에? 내가 뭐 잘못 했어?”
하고, 나의 쪽을 향하여 말을 걸었다. 나는 나에게 그런 줄 알고 의아해서
“뭐? 나보고 그러는 거야?”
했더니, 승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아냐. 영임이가 날 보고 웃잖아.”
하자, 영임이가 다시 낄낄거리면서
“너 이마에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썼어.”
하였다. 이 말에 아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바라보고서는 승희의 이마에 팔뚝으로 문지른 자국이 흙투성이 인 것을 보고 한 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승희가 울상이 되어서
“왜에. 얼굴에 뭣이 묻었는데?”
“얼굴이 아니라 이마에 흙이 묻었다구.....”
내가 대답을 해주자 승희는 그제야 웃으면서
“넌 안 묻은 줄 알고, 너희들도 다 묻었어. 옆에 사람에게 물어봐.”
하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미 일이 끝난 아이들이 잠시 쉬었다가 다른 사람의 줄을 잡아서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형주는 어느 새에 자기 줄을 널펀하게 다 베어 눕혀 놓고서 선생님의 두둑을 거꾸로 베어 오고 있었다. 문섭이도 다 베고 나서 가장 길게 남은 승희의 줄에서 중간에서부터 베어서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는 1학년 입학을 해서 졸업을 하도록 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같은 반에서 그대로 올라가기 때문에 모두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만약 한 동네에 사는 여자아이가 아파서 걷지 못할 만큼 심하면 남자아이들이 들쳐 업고 달려갈 만큼 우리들은 남자, 여자를 따지고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서나 남자니 여자니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고, 이렇게 도와주어도 어느 누구도 흉을 보거나 이상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같은 학급의 친구일 뿐이었고,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논의 보리 베기가 끝나기까지는 불과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열심히 베었든지 모두들 말을 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승희네가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웃음꽃을 피운 것이 전부였다. 선생님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서 주르르 흘러내리고 등줄기를 타고 내린 땀이 흘러 내여서 바지의 허리띠 부근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 잠깐 쉬자, 우리가 벤 것이 450평이라는데 꼭 25분이 걸렸나보다. 이렇게 하다보면 오늘 너무 많이 베게 될 것 같은 데 걱정이다 너무 힘을 빼지 말아라. 하루 종일 베려면 안 된다”하시면서, 논둑에 걸터앉으셨다.

나는 그냥 쉬는 것보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서 “산 위에서 부는 바람......”하고 노래를 시작하였다. 모두들 따라 불러 주어서 금세 음악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음 논으로 가서 자기가 맡을 줄을 잡으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신이 나고 힘이 덜 드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더운 날씨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더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가 지나는 들판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듯이 보리가 베어져 눕고 말았다. 벌써 들판의 한 부분이 우리들의 손으로 깨끗하게 베어져 가고 하늘 높이 떠오른 햇볕은 목덜미를 따끔거릴 정도로 따가워 졌다. 우리는 시내에 가서 파놓은 웅덩이에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고, 목에 두르면 훨씬 더 시원해졌다.

한 시간쯤 일을 하고 잠시 쉬고, 다시 시작하여 쉬기를 세 번째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논주인 되시는 분들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주셔서 그걸 먹으면서 잠시잠시 쉬었기 때문에 우린 그리 지치지는 않았다. 들판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밑으로 모여든 우리는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뜨뜻한 무더위로 우리를 감싸 안았지만, 땀을 흘린 우리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더운 줄을 몰랐다. 점심을 먹고 나자 남자아이들은 시내의 웅덩이에서 멱을 감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여자아이들도 가고 싶었지만 시내에 물이 넉넉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그늘에서 친구들과 손뼉치기를 하면서 놀고 있을 때, 남자아이들이 돌아오면서 “야 ! 너희들도 좀 씻고 와라. 그래도 물에 씻으니까 훨씬 낫다. 더운 줄을 모르겠어” 하면서 우리더러 가보라고 하였다. 정말 우리들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물이 얼마나 있어서 남자들이 더럽혀 놓은 물웅덩이가 깨끗해 졌을까?’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야! 여자들도 가서 좀 씻어라. 옷을 벗고 들어 갈만한 물은 없어도 발목을 적시고 씻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가보라고 하셔서 일단 우리들은 시냇가로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시냇가에 가자마자 제법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풍덩”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옷들을 입은 채로 물 속에 뛰어 들어서 서로 물을 끼얹기도 하고, 물 속에 텀벙 잠기기도 하였다.

금세 시냇가는 왁자그르르 우리들의 소리로 채워져 버렸다. 한 동안 정신없이 물장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벌써 제법 흘렀던가 선생님께서 그만 나오라는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주셨다. 우리는 잔뜩 젖은 옷을 대충 물기를 훑어 내려서 털고 나섰다. 그 정도만으로도 얼마나 시원했는지, 아마도 시원한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의 물 속도 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옷이 좀 마를 동안에 우리는 들판 한가운데서 신나는 음악 시간을 하였다. 교실 안에서 부른 노래보다는 너른 들판 한 가운데서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보는 것도 상쾌한 기분이었다.

오후에 우리는 정말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논들이 우리가 지나는 대로 깨끗하게 깎여져 들어 누운 것만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오후 5시가 되어서 해가 좀 설풋하게 기울자 이제 더위는 좀 가신 것 같았지만, 우리는 상당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보리를 베는 논의 주인아저씨가 우리들이 쉬는 시간에 맞춰서 간식을 가지고 오셨다.

“자, 아이들아 나오너라. 세참 가지고 왔다. 시원한 아이스 바를 사왔어 !”

아이들은 모두 베던 낫을 내던지고 논둑으로 나왔다.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야! 다친다. 너무 달리지 마라. 위험하니까. 모두 다 줄 수 있게 사오셨을 거니까 차례로 와도 돼. 염려들 말고”하시면서 안전을 당부 하셨다.

아이들이 몰려 와서 줄을 서자 아저씨가 모두 하나씩 아이스 바를 들려 주셨다. 우리는 너무 반갑고 시원해서 더위가 다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둘째 날의 작업이 끝났을 때는 오후 5시 20분경 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우리는 아침에 약속했던 대로 9000평이나 되는 논을 모두 베고 나서도, 600평을 더 베었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한 마지기 가까이씩이나 벤 것이란다.

선생님은 한 마지기가 얼마나 되는 땅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면서 우리에게 “야! 너희들 정말 국민학교 6학년이 맞니? 아무래도 너희들은 농군들인가 보다. 너희들이 오늘 벤 논은 9600평이나 되는데, 한 사람이 대략 저 논 한 뙤기 만큼씩이나 벤 거야. 엄청나지 않니?”하시면서 우리들을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많은 논을 베었는지 다시 한번 우리가 벤 자리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이 들판에서 보리를 벤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벤 자리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말 들판의 한 부분을 몽땅 베어 버린 것이었다.

“자, 이제 오늘의 작업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지치고 힘이 들 테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시원한 물로 깨끗이 씻고 나서 벽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약 30분만 있으면 다리 아픈 것이 좀 풀릴 것이다. 꼭 그렇게 좀 해라. 알겠지?”

“오늘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했어. 내일을 아무리 많은 부탁이 있어도 우리가 너무 무리하게 해선 안 되겠다. 너희들의 힘에 겨운 일을 시킨 것은 오늘 내가 잘 못 생각 한 거야. 내일은 좀 적게 할 테니까 오늘 잘 쉬고 나오도록 해라.”

우리는 학교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돌아 와야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내일 공부한 한 시간 책만 들고 가면 되니까 그냥 가기로 하였다. 들판에서 우리 마을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는 들판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친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기운이 없어서 터덜터덜 돌아갔다. 선생님도 오늘 일을 끝내고 나서는 혼자서 계산을 해보셨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신 것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잔다고 생각하고 잠이 든 것이 그만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났었다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억지로 깨워서 저녁을 한술 떠먹고 다시 들어 눕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아귀가 아파서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팔목 운동을 시켜주기까지 하였지만, 아침밥을 먹으려니까 수저를 잘 쥘 수가 없었다.

이런 나의 꼴을 보신 아버지께서 혀를 차시면서 “아니 어린것들에게 얼마나 일을 시켰으면 저렇게 수저질을 못하고 저럴까? 아직 어린 학생들인데 농촌 일손 돕기도 좋지만 어지간히 해야지 아이들이 견디겠어?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저렇게 함부로 일을 시킬 수가 있나? 원”하시는 것을 듣고 나는 만약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면 선생님과 싸움이라도 벌이 실 것 만 같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어요.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품삯을 받아서 우리들 가을 수학여행을 가자고 우리들이 하자고 그런 것 이예요. 선생님도 우리랑 함께 일을 하시느라고 옷도 땀으로 다 젖고 기운이 없어서 흔들거릴 지경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어제처럼 많이 하면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들이 팔 다리를 쉽게 풀리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저 녀석은 제 아비 말은 안 듣더니 선생님은 감싸고돌면서 하는 짓이 뭐야 지금?”
“아앙, 아빠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이랑 싸움이라도 하면 나는 학급에서 쫓겨난단 말이예요.”
“왜? 네가 일러 바쳤다고 선생님이 혼낼까 봐서?”
“아니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쫓겨나요.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했으니까 선생님이 책임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알았으니 어서 밥 먹고 나가서 오늘은 열 마지기씩만 베어라.”

아버지께서 우리들이 하는 일이 못 마땅하셔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한 사람이 열 마지기라니 그러면 어제 학급 전체가 벤 만큼씩을 베어란 말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미운 소리는 하셨지만,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낫을 잘 갈아서 다치지 않게 새끼로 말아서 잘 싸서 내 운동화 옆에 놔주셨다.

엊저녁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니 그래도 몸이 개운하여서 얼른 학교를 향하였다. 어제 가방도 안 가져 왔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공부할 국어 책만 한 권 달랑 들고, 낫을 들었으니 학교에 가는 것인지 일터에 가는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에 지친 우리들이지만 아침에 집 앞에 나서니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힘든 일을 했느냐는 듯이 여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몸이 약한 윤숙이도 힘든 기색도 없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팔이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제처럼 많은 논을 베지 않기로 했다. 어제 너희들이 너무 무리를 해서 몸살이 나서 다들 학교에 못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단 한 사람도 결석을 하지 않고 다 나왔으니 참 다행이구나. 엊저녁에 힘들었지?”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이 “아니요”하자, 선생님은 어깨를 휘돌리는 동작을 하시면서 “그래? 난 엊저녁에 어깨가 아파서 아이들에게 두들겨라, 주물러라 야단을 했는데?”하시자, 우리들은 “에게, 그 꼬마들이 두들겨서 시원해요?”하고 선생님을 놀리기까지 하였다.

선생님은 학교 안의 사택에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선생님 댁의 아이들을 잘 안다. 2학년짜리 딸아이와 다섯 살, 네 살짜리 두 아들을 두셨는데,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우리들을 잘 따라서 가끔씩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 주기도 한다. 아직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밀어 주면서 귀여워서 서로 업어 주려고 쟁탈전이 벌어 지기도 하였었다. 그런데 그런 꼬마들이 두들겨 보았자 선생님의 어깨가 시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간 공부를 마치자 벌써 우리들이 작업을 하러 갈 논의 주인이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손이 없는 노인들만 사시는 댁이어서 우선 해드리기로 약속을 했더니, 혹시 다른 곳으로 갈까 걱정이 되셔서 미리 와서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왕 일손을 돕는 것이지만 일할 만한 젊은 분이 안 계신 그런 댁의 일부터 해 드리는 게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우선적으로 해드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새끼미 마을의 앞들에서 베기로 한 날 이었다. 이 마을의 원호 가족 한 집과 노인들만 있는 집, 그리고 우리 반의 정아네 인데, 할아버지가 농삿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몸이 허약하여 일을 못하시는 댁인데, 할아버지께서 앓아 누우셨다고 해서 그 집의 일손을 도와 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학교에서 동남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산기슭으로부터 흘러내린 듯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그래서 논들이 계단식이고 그리 넓은 것이 별로 없이 한배미가 보통 한 두 마지기씩이나 되는 것들이었다. 300에서 500평 정도의 논바닥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두 세 배미씩 나누어서 들어섰다. 아이들이 힘이 들기는 하였지만, 사흘째가 되니까 낫질을 하는 요령이 생기고 보리 베기에 익숙해져서 점점 더 베는 속도가 빨라졌다.

학교에서 건너와서 우리 동네 정자나무 아래에다가 도시락을 가져다 두고, 논에 들어서서 작업을 시작 한 것이 10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는데,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정아네 집의 논 7마지기를 몽땅 다 베어 버렸고, 원호 가정의 논 다섯 마지기까지 거의 다 베었다. 점심 전에 3600평이나 되는 논의 보리를 다 벤 셈이 된 것이다. 정자나무 아래 제법 너른 마당이 있어서 점심을 여기서 먹게 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커다란 주전자에다가 시원한 물을 퍼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드리자 “고맙다. 은자야. 집까지 제법 먼데 일부러 가서 이렇게 시원한 물을 떠오니 고맙구나. 아이들이 얼마나 반갑겠니?”하시면서, 차례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모두 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 잠시 쉬라고 하나 아이들은 그 동안에 고누를 두는 아이들, 씨름을 하는 아이들,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로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선생님께서 정자나무에 기대고 눈을 감으시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큰 소리를 하셔서 우리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잠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바로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라고 했던 선생님의 친구가 있었단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의 일이구나”하시자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멈추고 모두들 선생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 전쯤의 일이다. 이 마을에 살던 선생님의 친구가 몹시 집안이 가난하여서 끼니를 제대로 먹고 살 수가 없었단다. 그 무렵에는 모내기를 하면 모내기 나온 사람들의 식구는 모두 다 나와서 모내기하는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지. 부잣집에서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풍습이었단다. 그래서 그 친구가 아침도 굶고 나와서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은 이렇게 커다란 그릇에다가 고봉으로 수북하게 밥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득 담은 어머니의 밥을 그 친구가 혼자서 다 먹은 거야. 겨우 일곱 살짜리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타다 잡수셨지만, 일곱, 여덟 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어른 밥을 수북하게 한 그릇 다 먹었으니 얼마나 배가 불렀겠니? 배가 남산만 해 가지고 여기 이렇게 기대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지금 너희들처럼 뛰어 노는 거야. 이 친구 뛰고는 싶은데 배가 불러서 뛸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선생님이 여기까지 이야기 하셨으니 무슨 말인지 모를 우리들이 아니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서 합창을 하였다.

“얘들아 앉아서 노올자 !”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모두들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고 한바탕 웃음보따리를 풀었다. 우리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는데, 학교 다닐 적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곳에서 학교를 마치고 우리 학교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이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오후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또 다시 시끌벅적하게 놀이를 시작하였다. 정말 나무에 기대어서 ‘얘들아 앉아서 놀자’ 하는 얘들도 있었다.

오후엔 비가 내릴 듯이 구름이 끼어서 작업하기엔 좋았지만, 어른들은 이제 비가 올 가봐 걱정들을 하셨다. 그렇다고 베기로 한 논을 다 베지 않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보리를 베어 나갔다. 오전 보다 훨씬 더 일을 하기가 쉽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어제 보다 도 더 많은 실적을 올렸다. 오늘을 1만평이 넘는 논의 보리를 베었다. 1만1400평을 베었는데도 어제보다 40분이나 빨리 끝났다. 더 벨 논만 있었으면, 아마도 40마지기는 베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논을 베고 나자 동네 어른들이 나오셔서 혀를 내두르셨다.

“아니? 이 아이들이 하루에 1만1000평을 더 베었단 말이야? 그럼 거의 한 사람이 한 마지기씩을 베었는데? 그럼 어른들과 같은 거 아니야? 아이구 놀래라. 원 아이들이 뭐 이렇게 일을 잘해?”하시는 분은 바로 이 동네 이장님이셨다.

“야! 너희들 이젠 저희들이 어른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게 생겼는데?”하시면서 앞에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제 너무 힘들어 하길레 오늘은 조금 적에 하겠다고 했는데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이 베었는데도 이렇게 일찍 끝났는데요”하고 이장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자, 오늘 일은 여기서 마친다. 너희들이 너무 일을 잘해서 이장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셨는데, 난 너희들이 지칠까봐 걱정이다. 집에 가서 잘 씻고 다리도 좀 주물러야 한다. 팔과 어깨도 주무르고 푹 쉬도록 하여라"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끝나서 섭섭한지 한바탕 놀이를 하다가 떠났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보리 베기를 한 것이 열흘 동안이나 되었고, 그 동안에 번 돈이 6만4000원이나 되었다. 320마지기(9만6000평)나 되는 논의 보리를 우리가 다 베어낸 것이다. 완전히 우리 고장의 논보리의 1/3은 우리가 베었다고 소문이 났다.

이렇게 열흘씩이나 보리를 베고 나니 아이들은 코피를 쏟는 아이들도 있고 모두들 지쳤다. 선생님은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안 된다. 난 너희들이 스스로 벌어서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결심을 보고 지금까지 함께 일을 했지만 , 이젠 나도 지쳐서 더 이상 안 되겠다. 너희들 벌써 코피를 쏟은 아이가 몇 이냐?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4일간은 작업을 나가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더 이상 내 보낼 수 없어. 이젠 안 나간다. 알겠나?”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는 기가 죽었다. 날마다 돈이 불어나는 것이 좋아서 계속 하자고 하였지만, 지친 아이들이 많아서 더 이상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선 나도 지쳐서 이제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 동안 못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체육 음악 같은 시간은 줄이면서 우선 국, 산, 사, 자 4과목의 공부를 계속하였다. 오후 5시가 되도록 하루 열 시간이라도 좋다고 공부에 매달린 우리는 4일 동안에 열흘 동안의 모자란 공부 진도를 거의 다 맞추었다. 우리는 매달마다 월말 일제 고사를 보아서 그 점수만 가지고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안 배우고 시험을 볼 수 없어서 무척 바빴다. 월말이 다가왔었기 때문에 일제고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작업을 하느라고 시험 범위까지 배우지도 못해서 서둘러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 자습시간까지 공부 시간으로 해서 간신히 시험 범위까지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 첫 주에 5월말 일제고사를 치르고 나자,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조금 내렸다. 이 비가 오자 농촌은 진짜 야단이 났다. 지금까지 논에 물이 없어서 갈지도 못하고 논둑을 붙이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논을 갈고 논둑을 붙여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서 단 한 사람도 일손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또 다시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모내기 농촌일손 돕기 운동'을 펼쳐라는 지시가 잇달아 내려 왔다. 하긴 그 때만 하여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대부분이 농사에서 얻던 시절인데 이렇게 날씨가 가물어서 전 국민이 나서서 가뭄대책을 서두르다가 비가 왔으니,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다 모아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만약에 위에서 이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농번기 방학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또 다시 들판으로 나섰다. 날마다 이 들판 저 들판으로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였다. 어떤 논에는 아직 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모를 낼 수가 없어서, 호미를 들고 가서 모를 호미를 일일이 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여도 우리는 기뻤다. 못자리에서 모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들판을 지나는 시냇가에서 물을 퍼 나르던 때를 생각하면 모내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절로 났다. 우리는 일주일을 날마다 논으로 나가서 모내기를 돕는 일을 하였다. 물론 우리는 모내기를 해주면서도 조금씩 돈을 받아서 우리들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하는데 보탬이 되게 모았다. 모내기 일주일 동안에 우린 매일 6000원씩을 벌어 들였다. 모내기는 한 마지기에 300원씩을 주셨다. 보리 베기와는 달리 모내기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까, 일을 많이 하기보다는 정신을 쏟아서 모를 잘 심는 것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껏 모를 심었다. 

"아이들이 심는다고 농사 망친다고 안 된다고 했더니, 어찌나 꼼꼼하게 심었는지, 어른들이 심은 것보다 더 잘 심었어!"하는 칭찬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선 우리가 모두 농촌에서 자랐고, 농사를 짓는 집의 아이들이니까 남의 농사를 망쳤다는 얘기를 들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남의 농사를 망친 것은 내 농사를 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 아닌가?’

다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내기를 정성껏 하였고 다행히 잘 심었다고 칭찬을 듣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모내기를 일주일 하는 동안에 3만6000원을 더 벌어서 모두 10만원을 모았다. 우리 한 사람 몫으로 2200원이 넘는 돈이었다. 이 정도면 한 사람이 1000원 정도씩만 내면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모은 돈에 희망을 걸고 11월에 수학여행을 갈 때까지 무엇을 해서 돈을 더 모으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7월 초순에 들어서 학교에서는 학교공원화사업을 추진하시던 교장선생님은 학교 화단에다가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 신사임당, 반공소년 이승복상, 효자 정재수의 상, 그리고 동물상으로 호랑이, 사자, 기린, 꽃사슴, 등을 세우기로 하면서 학부형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학부형들의 기부금이 모자라자 학교 안의 모든 돈을 쓸어 모으게 되었다. 이 때 학교에서는 6학년 어린이들의 수학여행비로 모은 돈을 학교 공원화 사업비로 내어놓으라는 것이었다.

“김선생, 지금 학교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직접 찾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모아 봤으니 더 잘 알 것이네. 그래서 말인데. 6학년이 모아둔 돈을 좀 내어놓을 수 없겠나?”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선생님께 요구하였다. 그러자 우리 선생님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수학여행비로 모으기 위해서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면서 보리 베기하고 모내기하여서 모은 돈입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여서 모은 돈입니다. 그걸 내 놓으라면 안 될 말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거절을 하셨다.

그러자, 학교 경리를 책임지고 있던 강 선생은 우리 담임선생님께 폭언을 하면서 “교장선생님이 하라면 하는 것이지 뭐여? 안 된다고? 학교 안에서 교장의 말을 안 듣고 대들겠단 말이여?”하고 협박을 하였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협박이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반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의견을 모아서 한 일이고, 그 아이들이 일을 해서 모은 돈이니까, 그건 아이들의 돈이지 내 돈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말을 합니까? 담임이 아이들을 속이고 일을 시켜 먹고 그 돈을 빼앗아야 한단 말입니까? 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끝까지 반대를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이 일로 해서 학교 안은 한창 소란이 일어났다. 교장선생님과 경리 담당 강선생님은 ‘돈을 내어놓아서 학교 일에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젊은 선생님들은 이와 반대로 ‘무슨 소리야, 아이들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걸 내놓으라니 말도 안 돼! 교장선생님도 참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기어이 지금 세워야 하나?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인 돈인데 그걸 내놓으라면 담임은 아이들에게 뭐라고 하란 말이야?“하면서 반대를 하였다. 결국 선생님들까지 두 파로 나뉘어서 의견이 달랐다. 이렇게 학교 안에서도 야단이 났지만, 아직 우리들에게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우린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 이번에는 교장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을 불러서 “이미 주문을 해 놓았으니 그리 알게. 내가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맡은 일이 아닌가? 학교 공원화 사업을 하려면 어쩌겠나?”하면서 ‘이미 주문을 해놨으니 그리 알아라’고 일방적으로 다그쳤다. 그러나 우리 선생님은 “전 못합니다. 제가 아이들과 약속을 한 일입니다. 그럼 제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일을 부려먹었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수학여행비를 번다는 생각으로 그 어린것들이 코피를 흘려 가면서 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내놓으라고 어떻게 말을 하란 말입니까? 제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못 합니다”하고, 끝까지 반대를 하고 나섰단다.

이렇게 되자 교장선생님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김선생은 빠지시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겠소.”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직접 아이들을 설득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설득시키시겠단 말씀입니까? 강제로 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도록 만드시겠단 말씀입니까? ‘손들어’라고 하지 말고, 찬반 비밀 투표를 해서 결정을 하시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빤히 쳐다보면서 ‘반대하는 사람 손들어’ 식으로 결정을 한다면 저는 인정 못합니다. 아무리 교장이시고 이 학교의 책임자 이시지만, 이번 일만은 순수하게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결정에 의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마련한 거금입니다.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억지로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김선생 ! 그게 무슨 말이야? 억지로 빼앗다니? 지금 우리가 아이들의 돈을 빼앗아 먹겠다고 하는 건가? 학교를 위해서 협조를 하자는 것이 아닌가?”
“만약 아이들이 그 돈을 마련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그 돈이 없었다면 그 사업 중에 한두 개를 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아무 준비도 없이 주문을 하시고선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담임선생님이 너무나도 강하게 반대를 하시니까 교장 선생님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시는 눈치이셨다.

그 때 학교 회계사무를 맡은 강선생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김선생! 자네 뭔가? 나이 드신 교장선생님께 그렇게 대드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는 거여?”하고 소릴 지르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강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제가 뭘 잘 못했습니까? 제가 제 욕심 채우자고 그러는 겁니까 ? 아이들이 피 땀 흘려 마련한 그 돈을 억지로 내놓으라니까 그러지요.”

“그럼 교장선생님이 욕심을 채우려고 그 돈을 달라고 하는 거란 말인가? 학교 사업을 하자고 하다 보니까 모자라서 좀 돕자는데 그게 잘못됐다는 말이여!”

금방 치고 말겠다는 듯이 협박적이었다. 이 강 선생님은 우리 담임선생님의 형님과 동창생이어서 마치 동생을 대하듯이 함부로 하는 편이었다. 더구나 덩치도 크고 면내에서는 깡패란 말을 들을 만큼 자기 멋대로 하고 다니는 그런 분이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강선생님에게 지지 않고 “그건 아니지요. 만약 그 돈을 준비하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주문을 해놓고 어찌하려고 했는지 여쭤 보는 거예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주문을 해놓지는 않았을 거 아니예요?”

이렇게 따지자, 강 선생님은 “그거야 우리가 마을에 다니면서 협조를 받아 왔지 않아. 그런데 돈이 너무 모자라니까 그러는 거 다 알면서 왜 그래?”
“그래서 처음부터 돈이 준비된 만큼만 주문을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학부모님들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억지로 일을 벌여 놓고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야! 너 말 다했어? 정말 이렇게 협조하지 않고 대들 거야? 형을 봐서 참아 왔더니 아주 못 쓰겠구만.”
“강 선생님! 형님의 동기동창이시라고 저도 형님 대우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 큰 형님의 담임이셨다는 것도 알고 살아 왔구요. 그러나 이번 일을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이지 형님의 친구라고 그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이론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성질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인지 강 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을 향하여 재떨이를 내던졌다. 다행히 피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큰 일이 날 뻔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에 교무실에 선생님들은 점차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를 느끼고 하나 둘 교장실로 다가오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우르르 몰려들어서 담임선생님과 강선생님을 뜯어말리고 억지로 껴안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결국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여 결정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아이들이 마련한 돈을 쓰는데 아이들의 의견이 아니라 선생님들이 결정을 한다니.’

무엇인가 잘 못 되어 가고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혼자 힘으로 이렇게 학교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일단은 선생님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교무실에 모두 모였다.

한 시간 가량이나 의논을 계속한 결과는 일단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고, 아이들의 동의를 얻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아무리 그래도 저는 동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저히 제 양심으로는 아이들에게 협조를 해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저는 제가 어린이들에게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제나 나서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아이들에게도 이 말만은 해주셔야 합니다”하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이렇게 의논이 분분하던 일은 선생님들의 의견을 따라 일단 교장선생님이 교실에 들어 가셔서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기로 하였다.

“6학년 어린이 여러분 !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줄로 압니다. 학교 화단에 지금 여러 가지 동상모형을 설치하고 있는데,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가 돈을 거두어 주셔서 많이 도움이 되었지만, 아직 돈이 조금 모자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수학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돈을 학교 사업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의논을 하였으나 담임선생님은 여러분과의 약속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를 하여서 며칠 동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주문을 하여서 설치는 해놓았는데, 돈이 모자라서 못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모은 돈으로 학교 화단에 멋진 동상모형을 하나 만들어 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애써 모은 돈이고 피땀을 흘린 돈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로 한 것입니다. 협조해 주실 거지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교장선생님이 자기 아버지, 어머니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얼굴을 보일까봐 고개들을 푹 숙이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10여분에 걸친 이야기를 듣고서도 누구도 ‘좋다’ ‘싫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정도로만 이야기를 해 놓고 교장선생님은 나가버리셨다. 교장선생님은 이 정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으면 되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그런 정도에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동의를 해주지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교감선생님은 아주 얌전하신 선비 같은 분이셨다.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무리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대단히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것도 학교를 위한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 담임선생님은 너희들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교장선생님께 대들기까지 하셨고, 선생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이제 너희 담임선생님은 너희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그만큼 애를 쓰셨다. 이제는 너희들이 결정을 해야 할 때이다. 너희들이 양보를 하면 담임선생님이 학교에서나 여러 선생님들 사이에 좋은 분이 될 수 있겠지만 너희들이 끝까지 반대를 한다면 너희 선생님까지 욕을 먹게 되는 거다. 너희들을 위해서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너희 담임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지 않니?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여러 선생님들에게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 같구나.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하려고 한다. 어쩔 테냐? 너희들의 돈을 지킬 테냐, 아니면 담임선생님을 욕먹지 않게 해드릴 테냐?”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들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이런 우리들을 보면서 교감 선생님은 천천히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셨다.

“너희들이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피땀을 흘렸는지 내가 다 안다. 날마다 선생님에게 들었고, 너희 선생님이 녹초가 되어서 저녁을 먹자마자 떨어져 잠들곤 했으니까, 너희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만 하였지. 그런데 너희들이 잘 해주지 않으면 너희 선생님이 곤란해질 것 같구나. 너희 선생님이 끝까지 반대를 하고 있는데, 너희들까지 반대를 하면 그 돈을 쓰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좋아할 사람이 없게 되어서 따돌림을 받게 될 거야. 너희 선생님은 오직 너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저렇게 다른 선생님과 싸움까지 하였는데, 이제 어떻게 하겠니? 너희들이 양보
김선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노년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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