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워지는 것은 물이 아니고 마음

2011.06.01 14:30:00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약수터를 찾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 휴일 아침이면 으레 약수터로 마음이 간다. 일요일마다 찾는 약수터는 이제 나의 종교이다.

아침나절에 약수터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쌉싸래한 숲 향이 온몸에 묻는다. 도심의 매연을 닦아내듯 내 목덜미를 감싸고 지나는 새벽안개가 상큼하게 느껴진다.

오래 전에 약수터에 오르다 젖빛 안개를 만났다. 송곳 꽂을 곳도 없이 꽉 들어찬 젖빛 안개가 길을 막았다. 나는 그때 온통 무채색 덩어리인 안개가 아침 햇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면서 연출한 절경을 잊지 못한다. 안개가 걷히면서 허리 휘어진 노송의 자태, 적당히 평평한 바위 덩어리를 그렸는데 한 폭의 동양화였다.

약수터에 들어서면 기묘한 산세에 마음이 다가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위가 적조하다는 것이다. 맑은 새소리를 벗하며 아무 데나 누워서 하늘을 본다. 새소리는 신기하다. 적막한 가운데 울어대는 데도 적막을 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막을 더 돋운다. 그러면 적막은 또 내 상념의 길목에서 여울지고…….

옆 사람조차 돌아볼 짬도 없이 내닫는 것이 도심의 생활이다. 잡히지도 않는 삶의 이상을 향해 줄달음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닌가. 나를 몰아붙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있는 욕심이다. 내가 설정해 놓은 허욕(虛慾)이 오히려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내 안의 모습을 낮은 언덕에 기대어 보자. 이제 내 실존의 모습을 가볍게 하자.

무겁던 마음의 덩어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내려오는 길에 한갓지게 서 있는 나무들도 가벼이 인사를 건넨다. 넓은 허리에 천 년 풍상을 버티어 온 흔적을 달고 있다. 늘 굽은 듯 바르게 서 있는 나무는 마치 수도자(修道者)처럼 청정무후(淸淨無后)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제 예전의 약수터가 아니다. 약수터 입구가 번화가가 되었다. 길이 닦이고 음식점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핑계로 약수터 초입 언덕에 주차장을 만들었다. 유럽풍의 예쁜 집도 산중턱에 자리했다. 약수터 근처에는 주민 편의를 위해 운동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편의 시설이 생기면서 약수터를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었다. 물을 떠가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예 물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실어가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약수터는 사람보다 차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약수터 주변 풍경도 변했다. 물을 떠가려는 욕심이 끼어들기 시작한 약수터는 차례를 지켜서 문화시민이 되자는 등, 깨끗이 사용하자는 등 허섭스레기 같은 팻말이 붙었다. 게다가 약수터를 협시보살처럼 지키던 노송의 등걸에는 수질 검사 결과 중금속이 배출되지 않았다는 안내판까지 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요즘은 시들해졌다. 도로도 나고 주차장까지 생겨 편리해졌지만 물을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물을 찾는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물이 더러워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듯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더러운 물이 있었을까? 생각을 넓혀보니 처음부터 더러운 물이란 없었다. 산골짜기에서 생명수처럼 흐르는 물은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다. 물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흐르는 물을 따라 모여 살았고, 물을 이용해서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 이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우리의 곁으로 오면서 더러워졌다.

사실 약수가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졌다. 어릴 때 우물을 먹다가 수도가 들어와서 신기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들어서면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먹었다. 그때 물맛이 꿀맛이었고, 뼛속까지 시원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수돗물은 못 먹는 물이라고 했다. 급기야 산에서 나오는 물이 ‘약’이라고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마저도 먹지 못한다.

경제 논리로 따져도 물은 존재량이 풍부해서 돈이나 희생을 지불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자유재(自由財)이다. 그러나 대동강 물을 팔아먹던 김 선달을 비웃던 우리는 지금 비싼 샘물을 사 먹고 있다. 산으로 들로 놀러 갈 때도 가방에 먹는 샘물을 꼭 챙겨간다.

우리의 삶이 헝클어지는 경우는 대부분 우리의 욕심이 만든다. 산에 편리하게 가겠다는 욕심으로 도로를 낸 것이 결국 깨끗한 약수마저 더럽게 했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다면 약수터에 편하게 가겠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요즘 시간을 내 지방에 내려가면 편리함에 놀란다. 좁은 농로까지 확장을 하고 포장을 해서 못 가는 곳이 없다. 산 주변도 관광객 유치를 위해 편리한 시설이 즐비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 광경이 슬프게 다가온다. 산 중턱까지 깎아내고 도로를 낸 거며, 계곡까지 차지하고 있는 음식점이 오히려 자연을 헤지고 있다. 이 모두가 편리를 내세운 욕심이다.

개발의 이름으로 자연에 손을 대는 것도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숲은 빽빽한듯하지만, 서로 배려하며 여유 있는 풍치를 보이고 서 있다. 우리 모두는 저 나무들처럼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저 나무들처럼 무욕의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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