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상상하는 인류의 삶

2011.07.08 11:47:00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이세욱·임호경 옮김, 열린책들)을 읽고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다른 나라에선 그렇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선 많이 읽는다. 1991년에 발표한 ‘개미’부터 시작해 이후 ‘타나토노트’, ‘개미혁명’,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뇌’, ‘파피용’ 등 출판한 모든 책이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개미’는 내년에 출판될 문학 교과서에 실릴 예정이다. 이유는 그가 남긴 말에 어렴풋이 답이 있다. 그가 우리나라에 방문했을 때 “한국은 해외 국가 중 내 작품을 이해한 첫 번째 나라다”라는 말을 했다. 즉,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은 한국에서 유독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그의 작품이 뛰어났을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밝힌 바에 의하면 ‘개미’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12년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어떤 이유보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그에 맞게 번역도 잘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맞아야 한다. 기타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에 호감이 가는 마케팅도 있어야 할 것이다. 출판 시장에서 독자 마케팅은 이제 필수적 상황이다. 이러한 것이 복합되어 독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다.

나는 이번 ‘상상력 사전’을 읽으면서 이러한 추측에 확신의 방점을 찍었다. 그의 책은 치우친 생각도, 고정관념도 없었다. 서양인이면서 동서양의 삶을 어우르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였다. 과학자의 눈으로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원시부족의 관습까지 세밀하게 소개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인류의 삶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태어난 시기부터 죽음까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아기 때 거울을 만난다. 거울은 아기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아기는 상상 속에서 자기를 어떤 영웅과 동일시한다. 아기는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과 자기 주위에 다른 사람들과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부터 삶은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좌절의 원천이지만, 아기는 상상력 덕분에 삶의 어려움을 견뎌 나간다(‘거울의 단계’-p. 378). 인간의 죽음은 장례의 의미로 말한다. 최초의 장례는 약 12만 년 전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나타났다(‘장례’-p. 91). 장례는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의 출발점이다. 인간이 먼저 세상을 떠난 다른 인간에게 특별한 대접을 해주게 되면서 종교심뿐만 아니라 경이로운 상상의 세계가 태어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상력을 과학자답게 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전기의 중요성에 관하여(p. 449~450)’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엎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 대륙의 발견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콜럼버스로 알고 있는 이유는 그의 아들이 남긴 전기 때문이다. 즉, 콜럼버스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남겼다. 반면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는 아마 아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을 이루었다는 성취보다는 역사에 길이 남는 전기 작가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에 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숫자 ‘142,857(p. 71)’도 흥미를 끈다. 이 숫자는 곱하고 나누는 등 여러 가지 연산을 적용해도 다시 원래의 숫자로 돌아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42857을 차례대로 2,3,4,5,6을 곱하면 142857*2 = 285714, 142857*3 = 428571, 142857*4 = 571428, 142857*5 = 714285, 142857*6 = 857142처럼 모두 142857의 순서만 바꿔가며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7을 곱할 경우 142857*7 = 999999가 된다. 또 숫자 142857을 두개로 쪼개서 더해 보면 ‘142 + 857 = 999’ 이고 세 개로 쪼개서 계산해 보면, ‘14 + 28 + 57 = 99’이다. 142857 을 제곱하면 ‘20408122449’ 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를 둘로 쪼개서 더하면 ‘20408 + 122449 = 142857’ 이 된다.

언뜻 생각하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 다양한 계산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일정한 규칙이 만들어지는 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것도 놀랍고 감동적이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을 펼쳐 보이기도 하지만 철학적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거울(p. 50)’, 웃음(p. 261), ‘반대로 하기(p. 418)’ 등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특히 ‘임신(p. 413~414)’에서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의미심장한 논리를 펼친다.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은 아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기들을 생후 9개월 동안 보살펴 주는 것을 당연할 일로 여겼듯이 노인을 생애의 마지막 9개월 동안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넌지시 말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이다. 아래도 마찬가지다.

‘벗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은 행복을 얻는 방법 중에도 으뜸가는 것에 속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로를 바라보아도 되고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더 이상 마음을 쓰거나 떠벌릴 필요도 없다. 그저 말없이 함께 있음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함께 있기-p. 510).’




아주 짧은 글이지만 내용은 긴 여운이 있다. 오늘날 복잡한 시대는 반목과 질시가 팽배하는 사회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패배자는 좌절한다. 부와 빈곤, 행복과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꿋꿋이 살아가는 힘은 무엇일까.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함께 있으면 꽃처럼 향기로운 삶이 우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인류의 탄생(‘인류의 종족들’-p. 82)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사건과 인물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해석해내는 것은 물론(‘헤르메스’ -p. 72 등) 옛날 중국의 변방 이야기(‘새옹지마’-p.577)까지 세기와 공간을 넘나든다.

저자는 열네 살 때부터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노트를 기록해 왔다. 30년 이상 계속 써온 그 노트 속에는 스스로 떠올린 영감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 발상과 관점을 뒤집게 하는 사건들, 생각을 요구하는 수수께끼와 미스터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해석 등이 차곡차곡 쌓였다.

거기에 과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세계의 저명한 과학자들과 접촉한 경험이 더해지고, 인간의 영적·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문학적 탐구의 결과들이 더해지면서 그 노트는 독특하고 풍요로운 ‘백과사전’으로 자라났다.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이 책은 본문만 612쪽이다. 제법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띄엄띄엄 읽을 수 있고, 제목 아래 짧은 글은 쉬엄쉬엄 읽기에도 적당하다. 그저 곁에 두고 있다가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보고, 또 시간이 나면 읽을 수 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딱 좋은 책이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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