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 덕분에 이 학교가, 이 아이들이, 내 가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경제학자라는 지위를 내려놓고, 땅을 일구며 소박한 삶을 살았던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 그가 평생 지킨 원칙은 "덜 소유하고, 더 많이 존재하라." 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다."라는 신념을 삶 속에 실천한 스콧 니어링, 그는 백 번째 생일날 이웃들로부터 이런 글귀를 선물받았다고 합니다.
"당신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
그의 잣대와 거울에 비춰 보면 나는 존재보다는 소유를 향한 삶인 것만 같아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존재가 스러질 때, 소유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을 테니 누군가에게 남게 될 내 존재만이 나를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교단에서 보낸 시간이 내 인생의 시계를 채우고 있으니 나의 존재도 교단에서 만난 인생의 동료와 제자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진정한 존재를 위해서라면 그리 많은 소유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입니다. 아마도 내 인생의 시계가 산을 바라보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겠지요. 인디언 속담에 50대는 산을 바라보는 나이요, 60대는 산으로 가는 나이라고 했던가요?
인간의 기대 수명이 고무줄처럼 늘어나서 생각보다 오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렇게 오래 살기를 갈망한 세상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수명도 생명과학의 발달과 건강을 위한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60대 이후의 인생에 대한 기대는 장밋빛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는 목소리,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너머 사후 세계에 대한 초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갈망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이길 확실한 구원의 목소리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금 여기서 존재하는 시간에 한정된 것이고 미래를 꿈꾸게 하지만 그것마저도 의지나 희망사항일 뿐, 궁극적인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눈을 뜨고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살 수 있는 '존재하는 인간'으로 살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본다면 나보다 앞선 시각과 예측 가능한 전망을 몸으로 버여주며 살다간 선각자들의 삶은 늘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스콧 니어링과 같은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오늘 우리의 교육은 존재보다는 소유에 목숨을 걸고 더 많이 가진 자, 더 많이 아는 자, 더 높이 오르는 자를 양성하는 데에 몰입하고 올인하는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합니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가까워질수록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한 소유의 삶보다는 21g의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위해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론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교실에 옮겨보면 내 아이들의 영혼 속에 내 모습과 내 정신은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내가 남길 정신적 자산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그건 아마도 계절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확과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주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인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몸을 타고 난 축복이니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추수감사절을 가장 크게 생각하는 종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달여 남은 아이들과의 시간을 생각해 보니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정신적 자산으로 남겨줄지 다시금 생각합니다.
"내 존재 덕분에 이 학교가, 이 아이들이, 내 가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그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마지막 달력을 꾸미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