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르쳐준 교과서

2012.11.12 09:45:00

누구나 교과서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교과서를 생각하면 메말랐던 기억의 샘물이 흥건해진다. 아니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지금도 교과서를 들고 다니니 마르지 않는 일화가 쌓인다. 특히 얼마 전에는 내 글이 교과서에 실렸으니 이야말로 기쁨을 창조하는 샘이 되고 있다.

어릴 때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몸과 마음이 훌쩍 커서 학교에 갔다. 고학년이 될 때는 교과서가 두꺼워지고, 글씨도 작아져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는 형이 입던 교복을 입었지만, 교과서만은 새것이어서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 후에 잿빛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그때 ‘나는 훗날 무엇을 하면서 살까?’하면서 제법 어른스러운 질문에 답을 찾고 있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싹트기 시작했다. 공부도 멀리 했다.

나의 이런 마음에 대해 부모님은 시답지 않게 생각하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낫는 병이라며 무턱대고 학교로 등을 떠미셨다.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하루는 빈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 교과서는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것이 반항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메마른 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아버지께서 학교를 그만 두라고 강하게 나오셨다. 교과서도 모두 버린다는 꾸지람이 들렸다. 무서웠다. 우선 가방에 책을 담고 뛰쳐나왔다. 친구 집에서 학교에 갔다. 다음 날 학교로 어머니가 찾아 오셨다. 그러면서 내가 교과서를 팽개친 비행은 담임선생님께도 낱낱이 공개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선생님께 벌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원용문, 훗날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정년퇴임)께서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외워 오라고 말씀하셨다. 한 페이지 이상을 외워오라고 말씀하셨다. 수업 시간에 시와 시조를 외운 적은 있었다. 소설은 외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혹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벌을 받으면서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별다른 대안이 없어 그냥 학교에 다녔다고 해야 맞다. 그러던 중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소설 외우기를 시키셨다. 조금 더듬거리기도 했지만, 학급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소설을 외우는 괴짜로 옆 반에도 소문이 났다. 그 뒤로 나는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멋들어지게 외워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은근히 국어 시간을 기다렸다. 선생님도 좋았다. 소설 외우기라는 다소 엉뚱한 벌로 나를 이끌어주신 선생님이 좋았다. 교과서의 문학 작품을 읽으며, 갈증만 나던 마음도 촉촉해졌다.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당신의 시를 자주 읽어주셨다.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원시인(이 별명은 선생님의 성姓에 시인詩人을 결합한 의미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후덕하신 외모와 수염이 많아 원시인原始人이라는 의미도 있었다.)’이라고 킥킥대며 놀려댔지만, 나는 선생님의 시를 받아써가며 외어보려고 했다.

나는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문학과 가까워졌다. 문학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절망을 희망으로 역전시키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슬프면서도 장엄했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빼앗긴 들’로 표현한 이상화의 처절한 외침은 가슴을 울렸다. 생각해보니 나의 사춘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현실과 지향하는 미래 세계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뵈면서 꿈을 가졌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처럼 글을 쓰면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이런 꿈은 대학에서 조병화 선생님과 남광우 선생님을 만나면서 더욱 굳어졌다. 두 분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만났던 분이다. 그 분들은 큰 산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분들은 사치스러운 말씀이 없으셨다. 묵묵히 연구하는 모습만 보여주셨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주셨다.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교직에 들어와 조병화 선생님의 시를 가르치는 날은 내가 더 수다스러웠다. 선생님의 사유(思惟)의 깊이까지 아는 것처럼 시를 해석했다. 남광우 선생님 글을 가르칠 때도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흉내 내며 수업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것처럼 좋아했다.



수업을 하면서 고등학교 때 소설을 외우던 생각을 떠올렸다. ‘소나기’의 주인공 ‘소년’의 독백을 외우면서 수업을 했다. 아예 시 단원을 수업할 때는 교실에 빈손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멋있게 보았다. 졸지에 실력 있는 선생님이라고 소문도 났다. 나는 더 우쭐했다.

경기도 교육청 장학 지도 공개 수업 때도 이 방법을 썼다. 교과서를 교탁에 올려놓았지만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살짝 긴장을 했을 뿐 나의 강의는 푸른 산에 맑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연습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나의 실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수업 평가 때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국어 담당 장학사가 무겁게 지적을 했다. ‘선생님의 현학적인 시 해석은 참 부럽습니다. 책도 안 보고 수업을 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수업은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얼굴이 뜨거웠다. 수업을 아이들과 함께하기 보다는 혼자 했다는 자괴감이 일었다.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자랑하듯 떠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때 교직에 막 발을 디뎠다. 가르치는 일에 서툰 것은 물론 자신도 없었다. 즉 교실에 교과서를 들고 들어가지 않고, 교과서에 가르칠 내용을 메모하지 않은 것은 부족한 나를 가리기 위한 위선이었다.

대학 때 선생님은 우리를 가르치기보다 마음이 열리도록 기다리셨다. 시 한편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우리가 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셨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일방적으로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 특히 ‘소나기’를 외우게 하신 것은 내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교과서를 꼬박꼬박 들고 수업을 했다. 이제 교과서에 깨알같이 메모를 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도 교과서에 이렇게 메모를 많이 하니 너희들도 따라하라고 일렀다. 내가 아는 것보다 아이들이 모르는 것에 치중했다. 아이들의 흥미와 욕구는 무엇인지, 그들의 생각을 키우는 수업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교과서는 나에게 삶을 가르쳐 주었다. 마음이 아플 때 교과서에서 위안을 얻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도 소설 외우기 벌로 시작되었다. 교직에 들어와서도 교과서 때문에 가르치는 것에 눈을 떴다. 이런 교과서가 최근 새로운 기쁨을 주었다. 교과서에 내 글과 이름 석 자가 올랐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대학 때 조병화 선생님의 영향으로 글 쓰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노력한 결과 꿈을 이루었다. 열심히 썼다. 그 결과 내가 쓴 글이 교과서에 올랐다. 그것도 두 군데나 실렸다. 중학교 국어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뀌면서 종류가 많아져서 그런 것이라지만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내 글이 올랐다는 것에 놀랍고 기쁘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과의 만남이 그렇다. 또 이번에 내 글이 교과서에 실린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좋은 글이 얼마든지 많은데 내 글이 운 좋게 실린 것이다. 나는 지금도 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을 만난다. 옛날 선생님이 교과서를 통해 아픔을 달래주고 꿈을 심어주셨던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교과서로 삶을 안내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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