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위폐를 모신 정읍의 무성서원

2013.10.21 11:58:00

서원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던 사람들의 위폐를 모시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한때 조선에는 650여개의 서원이 있었지만 혈연과 지연, 학벌과 당파 싸움으로 병폐가 많았고 서원이 면세전을 갖고 있어 조정에서는 재정확보에 어려움이 컸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궁핍한 국가재정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모조리 없앤 것은 아니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하마비를 지나려다 유생들에게 봉변을 당한 우암 송시열의 화양서원부터 붕당정치를 일삼는다고 생각하거나 명나라의 황제 및 중국학자를 모신 서원은 모두 철폐하였지만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등 선현 1명당 1개씩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잘 가꾸고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도 중요하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전국 9개 사원, 즉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돈암서원(논산), 무성서원(정읍)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키로 잠정 결정되었다. 서원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기억하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로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야 한다.

10월 9일, 찾는 사람이 적어 유유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무성서원에 다녀왔다. 머무는 동안 문화유산해설사의 친근한 설명이 곁들여지니 더 즐겁다.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다.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으로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유명한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한 이곳의 옛 지명은 태인이었고,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현령을 지낸 태산현이 있었다.

우리나라 유학자의 효시로 꼽히는 최치원의 위폐를 모신 곳으로 당시의 교육활동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현재의 모습은 다른 서원들과 달리 입구부터 초라하다.


주차장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홍살문이 맞이하고 서원 앞에 여러 개의 비석이 서있다. 서원철폐령 당시 영의정으로 대원군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응 불망비도 이곳에 있다. 정문 누각 현가루에 들어서면 약간 경사진 땅에 직선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사당인 태산사를 배치했다. 두 건물 주변으로 담이 둘러쳐져 있고 왼편에 있는 두 개의 비각 또한 담으로 둘러쳐져 있는 게 특이하다.


유생들이 거문고를 타며 가무를 즐겼던 누각 현가루에 오르면 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과 숲을 이룬 고목, 강수재로 가는 내삼문과 담장 밖의 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가는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서원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무성서원의 명륜당은 정면 5칸의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이곳의 천정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편액들이 많이 걸려있어 서원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마루에 앉아 세월의 무상함과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하며 인간의 도리를 지켰던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생각한다.


뒤편으로 가면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태산사가 있다. 지금은 최치원 외에도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사당의 출입문이 고개를 숙여야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낮아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세를 낮추고 경건하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오른쪽으로 내삼문을 나서면 유생들이 기거하는 강수재와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가 있다. 강수재에서 학습이 부진한 학생들이 보충학습을 했다는 것과 구한말 을사조약(1905년)에 분개해 일어선 의병들의 뜻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의병장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궐기했다가 희생된 의병 800여명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記蹟碑)가 이곳에 있다는 게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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