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19세 때 (B.C. 533년) 결혼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당시 공자는 정원을 관리하고 가축을 돌보며 창고에서 물건을 주고받는 일을 맡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가축들이 살지게 자랐고, 노나라 계씨의 창고 출납을 맡았을 때 셈이 정확했다고 했다. 하지만 공자는 독학으로 공부를 하고, 20세부터 제자들을 두었다. 그는 관료로서의 직분보다는 제자를 만나고 학문을 닦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천하를 주유하여 학문을 가르쳤는데 그중 가장 이채를 띤 제자는 자로였다. 자로는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로는 그의 字다. 그는 성격이 곧고 급해서 나무처럼 부러지기는 해도 구리처럼 휘지 않는 위인이었다. 동시에 공자에게도 지기를 싫어해 곧잘 아는 체하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런 자로의 성품을 잘 아는 공자가 말했다.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위정편)
제자가 되기 전 자로는 협객이었다. 협객이란 무예를 숭상하며 요즘말로 조폭과 비슷하다. 자로가 처음으로 공자를 만난 것은 공자의 명성에 질투심을 느끼고 자신의 일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자로는 닭과 돼지를 몰고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는 곳으로 찾아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공자는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네는 무엇을 좋아하나?”
자로가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나는 무예를 좋아한다.”
“그럼 학문도 좋아하느냐?”
자로는 기세를 올리며 대답했다.
“학문이 밥 먹여 주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어진 임금에게 간신이 없다면 옳음을 잃고, 선비로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면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줄을 타고 곧아지고, 말에는 채찍이 필요하며, 활에는 화살이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는 교학이 필요하다.”
교학 정신의 근본인 공자의 말에 우쭐하던 자로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후 자로가 다시 물었다.
“남산의 대나무는 바로잡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고, 이것을 사용하면 코뿔소 가죽도 뚫듯이 천부적인 무예를 갖고 있는 사람이 굳이 학문을 닦을 필요가 있을까요?”
공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대가 말하는 남산의 대나무에 쐐기나 화살촉을 박아 학문을 연마한다면 가죽만을 뚫겠는가?”
공자의 멋진 대답에 자로는 얼굴을 붉히면서 무릎을 꿇고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자로는 공자와의 논쟁만으로 항복한 것은 아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기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에 매력도 느꼈을 것이다. 이때 공자의 나이는 40세 전이고 자로의 나이는 31세였다고 한다. 제자가 된 자로는 누구보다도 공자를 끔찍이 모셨다. 공자에게 험담을 하면 누구든지 이유를 불문하고 입을 뭉개버려서 공자에게 여러 번 주의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공자는 ‘자로가 문하생이 되고 난 후 나의 험담이 없어졌어.’ 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로는 공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만약 스승님이 총사령관이 되신다면 누구를 참모로 쓰시겠습니까?”
“글쎄?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두들겨 잡고, 배도 없이 강을 건너려 하고, 죽음도 불사하고, 덤벙대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겠지.”(술이편)
공자는 자로의 사랑 확인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하지만 다른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기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서도 사치스런 옷을 입은 사람과 나란히 서서 태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로뿐일 거야.”
자로는 공자를 신처럼 존경하여 공자가 받는 푸대접에 하늘을 원망하며 슬피 울었다.
“악은 일시적으로 번성하고 최후에는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공자님 같은 분이 악에 고통을 받아야만 하나? 성인군자가 왜 가정적으로 불우해야만 하고 늙어서까지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하는가?”
세월이 지나 공자는 자로를 위나라 대부 공리의 가신으로 보냈다. 하루는 위나라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듣은 공자는 안절부절 못했다. 자로의 급한 성격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걱정대로 자로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로는 창을 찔려 목숨이 반쯤 끊어지면서도 말했다.
“군자는 죽을 때 죽더라도 갓을 벗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로는 죽음 앞에서도 갓끈을 똑바로 매었다. 자로의 나이 62세, 그의 시체는 무참하게 토막이 나 소금에 절여졌다고 한다. 자로의 곧고 급한 성격만큼이나 적도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로가 죽은 지 얼마 후 위나라의 사자가 소금으로 절인 자로의 시체를 공자 앞에 내놓자 공자는 대성통곡하면서 소금으로 만든 음식물을 모두 쏟아버렸다고 한다.
공자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다한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하여 공자를 찾아왔다. 어떤 사람은 공자를 비난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감복하여 제자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만난 공자의 제자 중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여, 자공, 염구, 자하, 자로 등 10명의 제자는 후세 공자의 학문을 전파하는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공자가 죽은 뒤 대부분 공자 무덤 옆에서 3년 상을 지냈다. 그 뒤 일부가 남아서 또다시 3년 상을 지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길렀다. 바로 그 제자들에 의해 논어가 만들어지고 공자의 사상은 중국 각지로 퍼져 공자를 오늘에도 살아남게 했다.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 완성된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