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위의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숯 덩어리로 금줄을 치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 땔감을 구해 겨울을 이겨냈다. 죽을 때에도 소나무로 만든 집안에서 앓다가 소나무로 만든 관에 누워 거름이 되는 삶을 선택했다. 그래서 소나무는 민족의 나무로 불렸다. 소나무는 벼슬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세조로부터 하사받았다는 정이품송이 그것이다. 소나무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중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소나무를 나타내는 ‘松’의 유래는 진시황이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한 뒤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짐이 이 나무에게 ‘公’을 주겠노라,’했다고 한다. 그래서 ‘木公’으로 불리다가 훗날 두 글자가 합쳐져 ‘松’이라는 한자가 생겨났다는 말도 있다. 公은 당시 벼슬 품계 중에 가장 높은 자리이다. 소나무는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한 나무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사용했던 소나무는 강원도 소나무(金剛松)였다. 지금도 우리나라 도처에 궁궐을 지을 만한 나무에 벼슬을 내린 나무가 몇 그루 있으며 영동지망에도 있다.
몇 해 전 우연히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다도해를 배경으로 우거진 산봉우리 활엽수가 남쪽지방임을 말해주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본 잎사귀 두툼한 나무가 정겨워서 다가가 보니 동백나무, 대나무 등 남쪽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활엽수 사이 소나무도 있었다. 그런데 이곳 소나무는 눈에 익은 영동지방 소나무와 달랐다. 잠자다 일어나 머리카락도 다듬지 않은 채 눈비비고 하품하는 여인과 같은 모습, 나는 그곳에서 본 소나무를 통해 잊고 있던 강릉의 소나무가 다시 생각났다. 푸른 청년의 기개, 눈 덮인 겨울이면 그 빛을 더욱 발하는 강릉의 소나무 말이다.
나는 소나무에 대한 생각을 다시 찾으려고 고향 길에 올랐다. 그러니까 이번 겨울 나는 소나무를 보고 싶어 고향인 강릉을 찾아갔다. 나는 혼자 버스에 올라 차창너머 산봉우리를 감상했다.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를 접하여 한참을 가니 부드러운 곡선의 산봉우리가 사라지고 울창한 산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원도로 접어든 것이다. 자동차가 한참을 더 달리더니 대관령이 나타났다. 백두대간이다.
나는 소나무와 함께 백두대간도 사랑한다. 소나무가 우리나라 나무라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강원도의 산은 우리나라 등줄기임에 틀림없다. 또한 서쪽의 산봉우리가 여인의 곡선을 나타내는 편안함을 주는 산이라면 백두대간은 수직적인 남성적 산줄기이다. 험준한 바위와 산세, 우거진 나무가 그렇다. 그러나 강원도의 산을 남성적으로 만드는 데는 소나무 때문일 것이다.
눈 덮인 대관령 정상에서부터 만나는 소나무는 젊은이의 기개를 일깨워준다. 푸르고 꿋꿋한 자세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 없는 선비의 모습이다. 대관령 고갯마루를 지날 때 이어지는 산자락을 보면 군데군데 낯설지 않은 침엽수림이 강릉을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침엽수림 가운데는 소나무가 으뜸이다. 나뭇가지 여지 저기 피어난 눈 꽃, 휘어진 나뭇가지, 차가운 밤바람을 몸으로 막아내고 아침을 맞이하는 자태에서 지조와 인고, 그리고 겸손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이 있기에 강릉 소나무로 된 것은 아닐까? 무겁게 누르는 겨울의 눈에서 겸허함을 배우고 추위를 통해 인고를 배운다. 이러한 겨울이 있기에 강릉의 소나무로 된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나는 강릉 소나무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