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가사에도 나오는 소나무는 민족의 나무이다. 우리의 기상과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우리 주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소나무와 밀접한 삶을 유지해 왔다. 비바람과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변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의 기상과 닮았다. 그래서 소나무는 민족의 나무다.
누구나 살다보면 상처를 남긴다. 상처는 지나간 시절의 흔적이다. 그리고 세월 속에 치유된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들어가 남아있다. 우리는 소나무에게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산하 100년을 훨씬 넘긴 소나무에게 빗살무늬 흔적 말이다. 빗살무늬 소나무 흔적은 일제가 남긴 상처다. 그 시절 소나무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어야 했다. 칼끝으로 새긴 빗살무늬 상처가 그것이다.
일제의 공출 명령을 받은 조선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소나무의 아랫도리를 벗겨내고 상처를 입혀야 했다. 상처받은 소나무는 신음하면서 치유의 진액을 흘렸다. 그것이 송진이다. 일제는 자기가 일으킨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군용기, 탱크, 자동차 등에 쓸 석유가 부족해졌다. 일제는 그 대용으로 송탄유를 사용하였다. 송탄유는 송진으로 만든 기름이다.
일제는 더 많은 송탄유 확보를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해 우리 국민을 착취해갔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할당량을 정해 송진 채취를 강요하고 어린 학생까지 동원했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산하를 누비면서 송진을 채취하여 바쳤다. 제국주의 침략에 쓰일 비행기, 탱크, 자동차의 기름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소나무들이 칼질을 당했으며,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소나무에 새겨진 빗살무늬 상처, 그것은 일제 통치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채취하는 송진도 모자라 ‘관솔 캐기’ 작업까지 강요했다. 송진 추출 작업은 소나무에 낸 빗살무늬 흠집을 타고 흐르는 곳에 매단 송진 채취 통으로 모여든 진액을 모으기 때문 운반이 간편했다. 그러나 ‘관솔 캐기’의 경우 땅속에 묻힌 것을 캐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더구나 관솔은 부피도 많아 포대에 담아 지게로 마을까지 운반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전쟁이 계속되면서 ‘관솔 캐기’는 연중으로 이어졌다. ‘송진 추출’은 계절이 있지만 ‘관솔 캐기’는 계절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농사일도 할 수 없어 겨울철 극심한 식량부족까지 맞이해야 했다. 고통을 피하려고 게으름을 피워도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는 더욱 많은 송탄유를 얻으려고 부락연맹, 애국반(愛國班) 같은 단체를 만들고 마을마다 할당량을 정하여 독려하였다. 그래도 일제는 성이 차지 않아 송진 추출 기술을 가르치거나 송탄유 추출용 톱, 깡통 등을 지급하면서 송탄유 채취에 열을 올렸다. 할당량 달성은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이루어져 달성하지 못하면 배급을 줄이거나 징용, 징병의 대상에 넣어 불이익을 주곤 했다. 조선인은 일제의 협박을 벗어나지 못해 어쩔 수없이 ‘송진 채취’, ‘관솔 캐기’에 동원되었다.
소나무에 난 빗살무늬 상처는 우리 조상의 상처다. 그러나 소나무는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세월을 이겨냈다. 이제 소나무의 상처는 흔적만 남아 후손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다. 일제의 침략과 6.25의 상처를 딛고 세계 경제와 한류 열풍의 문화를 이끄는 힘은 어쩌면 소나무의 가르침인 것일지 모른다. 소나무의 상처가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