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선행학습을 금지 법안을 마련으로 오는 8월부터 초·중·고교 및 대학에서 '선행학습'이 전면 금지된다. 정규 교육과정은 물론 '방과 후 학교'과정에서도 실시할 수 없고, 학원, 개인교습소 등 사교육 기관도 선행학습 광고 및 선전을 하지 못하게 됐다. 누구든지 공부할 자유는 있다. 어떤 공부를 하는가, 어떻게 얼마나 하는가 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에 반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자유다. 그런데 국회가 왜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마련했을까?
미래는 창의와 인성을 필요로 하는 사회로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비능률적인 공부 방법은 국가의 장래도 어둡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 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국어, 수학, 읽기 등에서 높은 성적을 올렸으나 창의적인 역량과 내적 동기, 목표의식, 자신감 등과 관련된 부분은 걱정스러운 결과를 나타냈다. 우리 아이들은 시켜서 하는 수동적 공부와 혼자 일에 익숙하지만 생각을 나누는 일, 더불어 일을 하는 일은 경험하지 못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여럿이 힘을 모아 정보를 재생산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우리 아이 공부의 목표가 점수를 잘 받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점수 잘 받는 교육을 통해 학교 생활 등급이 정해지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점수 잘 받는 교육 문제될 게 없겠지만 세계에서 재수생이 가장 많고 과외를 많이 받는 나라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게을리 해도 누구나 졸업한다. 공부보다는 취업이 목표다. 그 결과 노벨상 수상자가 없고 책 읽기에 게으른 학생으로 되어가고 있다. 대학 주변의 술집과 노래방, 유흥음식점이 현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된 것의 중심에는 입시제도와 우리 교육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것은 학원이다. 학부모도 예외가 아니다. 자녀의 희망, 적성, 소질보다 학교의 등급, 전공의 등급에 의해 자녀의 선택권을 강요하는지 생각해봐야 하겠다.
미래 사회는 인성과 창의성을 중시한다. 이른바 다양성과 창의성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교육은 과거와 같은 방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선행학습은 학교 공부 점수를 높이기 위해 미리 배우는 공부를 말한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교실에서 배우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책읽기를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의견을 모으는 방법을 모른다. 실패를 극복하는 의지도 줄어들고 창의력도 줄어든다. 선행학습을 통해 대학에 들어가더라도 미래를 이끄는 인재로 거듭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행학습을 많이 받은 학생은 학교 공부시간 눈빛부터 다르다. ‘아는 걸 또 배워?’ 졸린 눈으로 칠판을 보거나 다른 책을 펴놓고 혼자만의 시간 활용을 한다. 선행학습을 받은 학생은 학습 흥미부터 떨어지고 호기심도 없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도 노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외 공부를 통해 점수올리기의 효용성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체로 수동적인 공부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일은 교육의 정상화와 관련된다. 선행학습을 막는 법안 마련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많은 장벽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과 패권주의이다. 아직도 많은 대학이 영수국사과 중심의 주지 교과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초중고에서도 영수국사과 중심의 주지교과 비중이 높다. 하지만 인성과 감수성이 풍부한 교육을 위해서는 주지교과보다 예체능교과 비중을 확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 체육 교육은 우뇌교육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뇌는 좌우로 구분되는데 우측 뇌는 감성을 조절하는 뇌, 종합적인 고사 능력, 창의성을 발현을 지배한다. 반대로 좌측 뇌는 언어, 수리, 분석적 능력을 지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뇌의 기능을 살펴봐도 우뇌교육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뇌교육이 필요한지는 가정의 변화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한두 자녀의 시대, 가족끼리 한 끼 식사는 물론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대화도 못하는 가정이 대다수다. 우리 아이들은 감성을 교감하는 우뇌 활동은 가정에서부터 결핍되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체육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코스타리카가 그렇고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로 유명한 베네수엘라 사례를 살펴보면 우뇌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것이다. 입시제도 또한 우뇌영역 학습 활동을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과 패권주의를 타파하는 일이 시급하다.
다음으로 교육의 방법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지식전달중심의 교육은 아무래도 암기중심의 교육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암기중심, 지식전달 중심의 교육에서 함께 하는 프로젝트 중심의 수업 방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평가에서도 공동 활동의 가치를 많이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학원이 할 수 없는 프로젝트 중심활동 비중을 입시제도에 많이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8명이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도교대학, 놀고도 자기 할 일을 찾아 공부하는 이 대학교에 비밀의 답을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식전달 중심의 교육으로 흐르게 되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잦은 교과서 개편주기다. 우리나라는 매년 교과서를 바꾼다. 아마도 교과서 만들기 산업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나라는 교과서 물려주기도 한다. 교과서 개편주기가 이렇게 자주 바꾸는 이유는 교육이 혁신이라는 이름을 포장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정책 홍보수단으로 교육이 이용된다는 점이다. 시대에 따라 뒤바뀌는 교육 내용이 그것이다. 교과서업자(참고서 업자)의 로비, 교과서 산업에 뛰어드는 교수들의 묵인 등에 의해 교과서 주기가 바꿔지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 주기가 자주 바꾸면 입시제도도 바꿔지고 학부모들은 공교육을 믿지 못해 자녀를 학원으로 내몰게 된다.
교사들은 어떠한가? 교사들도 매년 새 교과서, 새 교육과정을 배워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기만의 교육 노하우가 축적되지 못하게 된다. ‘교원들에게 연수는 있어도 연구는 없다.’라는 말은 잦은 교과서 주기변경과 교육내용 변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고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유태인들의 교과서인 탈무드는 2000년 동안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치인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선행학습은 우리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원 만능주의, 창의성과 인성의 문제를 만드는 만병의 원인이다. 그러나 법으로 다스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학부모의 잘못이 학교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의 교육활동을 법으로 정하여 운영한다는 것 자치게 교육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미래를 이끌어나갈 제자들에게 선행학습의 효과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피부에 닿는 사회로 만들도록 교육계가 힘을 합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