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은 과학의 날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과학의 날은 1968년 과학기술처 출범 1주년을 맞아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동참을 유도하는 취지에서 제정됐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별도의 날을 잡아 과학주간, 과학의 날 행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행사는 과학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는데 기여할지 모르지만 과학에 대한 의식을 바꾸는 데는 미흡하다. 정부가 창조경제를 부르짖지만 과학의 힘을 키우는 데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조경제만 강조하면 경제적 측면에서 과학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은 경제의 종속물이 아니다. 경제의 종속물로 본다면 기초과학부터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기초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느리게 가야 한다. 당장의 성과보다 기초과학부터 강화하고 교육방법도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 과학의 기초체력이란 무엇일까? 뭐니 해도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키워주는 일이다. 호기심이 지혜의 원천이다.(Doubt is the beginning of wisdom.)이라는 속담이 있다.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 공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을 살펴보면 점수를 받기 위한 교육 때문 아이들의 호기심을 빼앗아가고 있다. 선행학습이 그렇다.
유태인 부모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묻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을 질문했니?’라는 것을 묻는다고 한다. 유태인의 도서관에 가면 이야기를 나누는 잡담으로 책을 읽기 힘들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어디서나 묻고 답하며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PISA 점수가 우리보다 훨씬 낮다. 하지만 세계에서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고,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나라가 되었다. 유태인에게 공부는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이다. 누가 많은 호기심을 갖고 얼마나 훌륭하게 해결하는가가 유태인 공부의 비결이 된 셈이다.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우리교육을 뒤돌아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이야 한다. 호기심을 망치는 교육, 그것은 일류대학 진학을 향해 질주하는 교육 풍토이다. 선행학습이 바로 그것이다. 선행학습은 본시 학습을 배우기 전에 먼저 공부하는 것이다. 과학의 경우 선행학습에 임한 아이들은 결과를 미리 알게 되어 실험할 필요를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산과 염기’에 대해 알아보는 단원을 배운다고 해보자. 실험하기 전 아이들은 어떻게 준비물을 갖추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할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리하고 예측한다. 어떤 아이들은 기발한 생각을 발표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이 말하는 의견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기도 한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나 시행착오를 통해 답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과학 하는 일이다.
그런데 미리 배운 아이들은 결과가 뻔한 내용이니 실험에 참여하려하지도 않는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점수를 높이기 위해 실험도 없이 과학적 지식을 집어넣었다고 해봐라. 수업시간 실험이 이루어지겠는가?
교과서에 나온 산과 염기에 대한 학습단원은 산과 염기라는 자료를 통해 과학 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호기심을 바탕으로 실험을 설계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찾고 성취의 보람을 얻는 것이다. 가르쳐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실험과 탐구를 통해 얻는 지식 습득 과정이 중요하다.
선행학습을 받은 아이들은 눈빛부터 틀리다. 호기심이 사라진 흐릿한 눈동자, 아이들의 시선은 선생님을 향하고 있지 않다. ‘넌 떠들어라. 다 알고 있다. 재미없다. 난 차라리 영어단어나 하나 더 외우자.’ 교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이 교실에 한둘 있으면 열심히 듣는 아이들도 불안해하여 금세 두세 명으로 확산된다. ‘공부 잘 하는 아이 축에 끼려면 나도 선행학습 해야 돼.’ 교실 분위기를 망치는데 일조한다. 호기심을 망치는 교육, 그것의 맨 위에는 대학입시가 있다.
호기심은 학습의 발화점이고 불쏘시개다. 호기심 충만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에 재미를 느낀다. 배워야 하겠다는 열정도 강하다. 과학의 시작, 공부의 시작, 그것은 호기심을 찾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