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을 왜 하는가. 재능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천재도 아니면서 글을 쓴다고 궁싯거리고 있다. 남들은 원고지를 앞에 놓으면 하루 저녁에 수십 장, 수백 장을 써 내려 간다지만, 나는 밤을 새워도 한 장도 못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는 즐거움도 없고, 재미도 없다. 오히려 힘든 노동이다. 그런데도 평생 글쓰기를 놓지 못한다. 이유는 그것이 내 삶의 결핍을 메워주는 즐거운 노동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잿빛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공부는 저만치 두고, 삶의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더 메말라 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학교만 나서면 방황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곳이 허름한 청계천이었다. 이곳에서 한용운을 만났다. 수업 시간에 ‘님의 침묵’만 배웠는데, 시집을 보는 순간 만해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느낌이었다. 시집 전편에 흐르는 빼앗긴 현실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극복 의지가 가슴을 뜨겁게 했다. 시인 윤동주도 마찬가지였다. ‘서시’만 배웠는데, 시집에서 ‘별 헤는 밤’을 읽었다. 애틋한 서정을 맑고 앳된 감각으로 노래해 나의 쓸쓸한 감정을 울렸다. 단테의 ‘신곡’을 펼쳐들고 읽고 또 읽고 하면서 오랫동안 고민의 늪에 빠져 있었던 때도 기억난다.
이런 경험 덕에 대학에 갈 때 망설이지 않았다.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갔다. 공부도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입학한 그해 가을에 역사가 소용돌이 쳤다. 철옹성 같은 유신 체제가 무너졌다. 캠퍼스는 군인이 주둔하고 기약 없는 휴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봄에 대학의 문을 열었지만 극심한 혼란이 지속됐다. 이때 쫓기듯 군에 갔다.
제대 후 다시 찾은 캠퍼스는 겉으로는 최루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시대의 불안은 여전했다. 분노의 가지는 아예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학우들은 공백도 역사이고 침묵도 발언이라며 폭음을 했다. 그 속에 있는 나는 더욱 고독했고, 답답했다. 군에 가기 전에 전투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던 친구들과 다시 만났다. 대학 후문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민중 문학, 민중시… 하면서, 먹은 술을 다시 게워 낼 때까지 토론을 했다. 첨예한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사랑이나, 눈물 타령만 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며 수업 시간을 베돌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부총장님인 조병화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등을 다독거리시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뜨거운 감정은 젊은이다워야 하고, 분출은 지성적이어야 한다. 때로는 그 감정을 숨길 줄도 알고,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 문학은 삶의 흔적이지만, 올곧게 가꾸어야만 격조 높은 향기가 난다. 꼭 현실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것만이 좋은 문학이 아니다. 현실을 극복하는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조병화 선생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강의실에서 진지하게 앉아 있게 되었다. 윤동주는 식민지 현실이라는 모순의 시대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망적인 허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밝히겠다고 노래했다. 김재홍 선생님 수업 시간에 윤동주의 현실 대응론 강의가 이어졌다. 시인 윤동주는 현실 생활과 괴리되어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무기력하게 사는 자신에 대해 자책과 현실적 괴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 삶에 지쳐 있었다. 병영 생활을 하고 캠퍼스에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사회는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평온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컬러 TV 덕분에 더욱 화려함에 취해 있었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던 우리들과는 다르게, 후배들은 외향적인 소비문화에만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달라진 세계에 융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는 현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문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문학 작품보다는 학문으로서의 문학 연구에 심취했다고나 할까. 특히 작품 연구, 작가 연구에 몰입했다.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와 김기림의 ‘시론’을 통독했다. 김현과 김윤식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는 근대의 기점을 영·정조까지 끌어올리고,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 문학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박고 설렜다.
대학을 졸업하고 소망하던 교직에 발을 디뎠다.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현실의 벽에 갇혔다. 감상의 주체자가 아이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시를 해석해서 가르치고, 소설도 시험에 나오는 것만 요약해서 친절하게(?) 감상 내용까지 주입했다. 그것이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위기가 왔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가 등장했다. 학력 위주의 교육으로 치닫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었다. 꼭 나를 두고 하는 외침처럼 들렸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미처 살피지 못한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노랫말에 있는 ‘이데아’도 있지만,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현실도 중요했다. 교실은 미래의 씨를 뿌리는 희망의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글로 썼다. 우리는 현실에 서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어느 한 가지로 이뤄지고 도달하는 종착역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큰물줄기 중에 하나라고 썼다.
처음에 실망이 컸던 아이들도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글로 이야기를 하니 마음을 여는 듯했다. 그래서 아예 등단의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시를 읽어 주셨듯이, 나도 아이들에게 글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마음속에 문학의 씨를 뿌려주셨듯이 아이들에게 내 글을 읽어주면서 그들의 미래 삶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글쓰기는 좌표를 잃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삶의 길목에서 흐트러진 영혼을 다시 추스르게 한다. 10대 때 방황을 할 때 문학이 아니었다면 곁길로 갔을 것이다. 20대는 80년대라는 역사적 공간을 힘겹게 건넜다. 그 시절 어두운 하늘 아래 방황하는 젊음을 안고 있었다. 까닭 없이 서러웠고, 많은 차가움을 참고 겨울을 나야했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뜨거운 생명을 닦아야 했다. 그것을 문학으로 했다. 문학에는 세상을 향한 진실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오직 물질과 향락으로 쏠리는 세태를 향해 삿대질을 할 수 있는 것도 글쓰기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세상을 향해 책임 있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삭막한 도시에서도 아름다움을 찾고, 하찮은 삶에서도 감동을 발견해야 한다. 이런 것이 내가 문학에 대해 재주도 없으면서 강행군을 하는 이유이다.
글을 쓰면 위대한 삶을 공급받는 느낌이다. 정신적으로 익사할 것 같은 거대한 혼돈의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나의 삶은 늘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터덜거리며 간다. 외롭고 힘겨운 삶에 위안을 주는 것이 글쓰기이다. 오늘 거친 세상의 숨결이 나를 몰아칠 때도 글쓰기를 하며 영혼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