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늘 스승이 있다

2015.05.26 09:24:00

논어에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는 말이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부모, 친구, 스승 등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훌륭한 인격을 완성한다. 그런가 하면 반면교사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측면을 거울삼아 가르침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나란 위인도 세상을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배우며 왔다. 특히 교직 선배들로부터 배운 것이 많다. 그들에게 배운 덕에 교단에서 30년 가까이 큰 탈 없이 서 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올곧게 채워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만난 교장선생님은 배울 것이 많아 지금도 마음에 그리워하고 있다. 그 분은 공경심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이며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으로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을 보이셨다.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에게나 존경심을 갖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실천하셨다. 이런 모습으로 학교는 수평적인 문화가 만들어지고, 교육 효과도 높았다. 특별한 프로그램 진행 없이 즐거운 학교,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데 큰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있다. 회사 사장도 학교 이사장도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서 오히려 해를 입는다. 이들은 자신이 차지한 지위와 그 아래 있는 사람의 관계에 차별적인 상하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차별 문화가 허용되지 않는다. 극심한 사회적 차별의 세상을 바꾸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가장 필요한 미덕은 바로 공경심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도 공경심이 없다면 온전하게 지키지 못한다.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필요한 것도 공경심이다. 수업 기술이 뛰어나도 아이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새내기 교사는 수업 기술이 다소 서툴더라도 아이들이 이해하고 수긍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낮잡아 대하면 수업은 겉돈다. 제법 연륜이 있고 가르치는 기술이 뛰어나도 아이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환영받지 못한다.

반면 본받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학부모의 촌지를 과하게 챙기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는 교실에 쓰는 선풍기, 사물함을 학부모에게 기댔다. 아이들이 야간 자습하는데 필요하다며 비용을 받고 육성회비, 어머니회비 등을 걷었다. 문제는 이 비용의 지출이 투명하지 않았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의문을 가졌지만, 결국 밝히지 못하고 끝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참 힘들었다. 사물함이나 선풍기는 학생들을 위해 부모님들이 설치해 주는 것이니 그런대로 이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외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때는 말을 못했다. 새내기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챙기기에 버거웠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이라면 ‘저런 교육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나는 저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라며 반성적 성찰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비리 능선의 정점에 있는 그들이 미웠지만, 그들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

말이 많은 사람을 보고 역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담았다. 그런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일장연설을 한다. 그는 사석에서도 대화를 독점하고, 무엇이든 설명을 한다. 살아온 경험과 관리자로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 아랫사람에게 자상히 일어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잘난 척 하며 설명하려 드는 버릇이 발동한다. 우월적 지위에 편승해 아랫사람을 침묵과 무기력의 고통 빠지게 한다. 이것도 일종에 폭력이라고 느끼는데, 그 바탕에는 자신이 상대방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자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변화로 인해 최근 핵심 가치가 소통으로 부각되고 있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조건도 소통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소통을 강조한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 문화가 넘치면서 오히려 소통이 차단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몇 년 전 새로 오신 교장선생님이 소통의 문화를 강조하며 회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라고 했다. 선생님들은 새로운 문화에 내심 기대가 컸다. 학교 분위기도 좋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의견을 내면 그때마다 교장 선생님이 이유를 댄다. 좋은 의견인데 여지없이 부정적 피드백을 한다. 즉 이미 결론은 있고, 형식적으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는 느낌이다. 매번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 결국 선생님들은 말하지 않기 시작했다.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회의 시간은 이제 지시 전달만 있고 발전적인 아이디어는 없다. 회의 분위기도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모두 냉소적인 자세로 앉아 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다른 학교로 우르르 전근을 갔다.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닮고 싶었다. 그들의 삶의 빙식대로 흉내내다보면 나도 그 근처에는 가지 않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멘토를 찾아다녔다. 그를 사표(師表)로 삼고 내 삶을 바르게 일궈내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고의 전환이 왔다. 멘토의 경험이라는 것이 모두 과거의 것이다. 내 미래 삶에 참고가 될지언정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멘토보다 여러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 최근에 유행하는 집단 지성이다. 한 사람의 리더에 이끌려 집단이 살아가는 모습은 미래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각은 전체주의로 갈 위험성이 있고, 그 사람이 침몰하면 조직은 흔들리게 된다. 사실 우리 역사는 한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폐단이 많았다. 한 사람은 수직적 구조 속에서 독점을 하고 더불어 있는 사람들은 좋은 의견을 마음속에만 담고 있어야 한다.

공자가 한 말이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는 온통 내 스승이다. 그것이 비록 나쁜 것이라도 나에게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내 생각은 위험한 측면이 많다고 생각해야 한다. 여러 사람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리고 사람은 평생 배우며 성장한다. 그렇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입은 하나고 귀는 둘이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신의 섭리이다.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결국 나는 계속 스승을 만나는 격이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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