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은 다양하다. 이해력, 민첩성, 창의성, 유연성, 성실성, 원만한 성격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여러 가지 능력을 크게 나누어보면 생계를 가능하게 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업무능력과 인성,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매우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인적 인성은 쉽게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가 사람을 평가하거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덕목으로 충(忠)을 제시했던 것 같다.
이 충은 곧잘 현대어의 ‘충성(忠誠)’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나를 키워주는 윗사람에 대한 복종이나 개가 주인에게 하는 복종도 때로는 ‘충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요즘엔 어딘지 모르게 부정적 이미지가 느껴진다.
공자가 말한 충은 그와는 매우 다른 의미가 있다. 충은 ‘중(中)’과 ‘심(心)’이라는 한자로 구성돼 있다. 글자 그대로 ‘가운데 마음’, 즉 ‘속 마음’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하면 진실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등이 된다. 마음이 이리 저리 이해 타산에 헷갈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타인이나 조직에 단순히 내 몸과 마음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를 할 때 내 진심을 다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자장(子張)이 “영윤(令尹·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 자문(子文)이 세 번 영윤이 되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으며, 옛날 자신이 맡은 영윤의 일을 반드시 신임 영윤에게 상세히 알려줬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 이에 공자가 “충성스럽다”라고 대답했다. 당시는 자기가 맡은 벼슬을 그만두면 아무런 조치 없이 떠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은 시대였다. 하지만 자문은 스스로 신임 영윤에게 업무인계를 철저히 하고 떠났다. 자문은 어디에 충성한 것일까? 국가인가? 임금인가? 후임자인가? 아니면 또 다른 대상인가?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편해서 견딜 수 없어서 자기의 진실한 속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 이것이 충성이다. 충성이란 바로 자기의 진실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조직이나 윗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거기에 쓴소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직원이 많아야 기업이 살고 조직이 산다.
의견이 다양하고 거대한 공동체인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대통령 기록물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임 시절 최창규 성균관장 등 전국 유도회 지도자 145명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충(忠)의 대상은 국민이고, 따라서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면 항의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효(孝)와 관련해서는 “효도를 위해 보모도 부모다워져야 하며 자식의 효도뿐 아니라 사회적 효도도 합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김 대통령은 “국가를 충의 대상으로 삼으면 과거 일본처럼 군국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충의 대상은 바로 국민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을 상기시킨 뒤 “헌법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한 것도 이를 의미한다” 고 밝혔다.
교육의 전당인 학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항상 잘 나가는 길목에는 언젠가는 위기가 온다. 이는 자기 목표에 도취되어 반성적인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위기이다. 이 위기 극복을 위해 항상 다른 사람들의 올바른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조직의 지도자는 모름지기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기를 귀울여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