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교과서 물려받기 우리도 배워볼까요”

2006.02.01 09:00:00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2월, 새 학년 시작을 앞두고 지난해의 묵은 교과서와 노트, 필기도구 등을 제 방 한가득 펼쳐놓고 정리하는 아들애를 돕다가 잡동사니 사이에 묻힌 유난히 낡은 과학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겉장은 벌써 어디로 떨어져 나가 없고 손때로 갈피갈피 말려 올라간 각 페이지, 여백의 군데군데 낙서까지, 지난 한 해 동안 아들애의 손에 몸살을 앓았을 과학책의 고단함이 한 눈에 읽히는 듯했다.

옆에 있는 영어와 수학책도 꼴이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올해까지 계속해서 2년 연속 써야 하는 체육책은 그나마 좀 얌전하게 간수한 듯했다. 대학의 원서 버금가는 두꺼운 지질의 교과서가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룬 아들애에게 한마디 주의를 줄 법도 하건만, 책 더미 속에서 과학책의 표지를 찾는 손길 중에도 잔소리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고 내심 대견하기조차 했다.

아들애가 지난 1년간 사용한 과학 교과서는 실은 헌책이다. 표지 안쪽에 쓰여 있는 우리 아들의 이름 위에 또 다른 두 아이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교과서의 주인이 3년 내리 세 번이 바뀌었던 모양이다. 지난 해 9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을 시작하면서 아들애는 새 교과서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는 녀석을 타일러서 되도록 깨끗하게 사용한 헌 책을 사도록 했는데 영어, 수학, 사회 등 죄다 남이 쓰던 것으로 장만하던 중에 과학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새 책, 새 공책, 새 필기도구로 산뜻하게 새 학년을 시작하고 싶었던 소망이 일그러져서 제 딴엔 기분이 후줄근했을 텐데도 녀석은 헌 책들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여 학년말에는 우등상도 받고, 특히나 과학과목은 학년 전체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갖가지 펜으로 어지럽게 밑줄이 그어진 공식하며, 연습문제 풀이에는 새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해답이 쓰여 있는 열악한(?) 환경의 교과서를 가지고도 우수한 성적을 냈으니 책을 좀 험하게 다루었다한들 대수일 것도 없고, 어미의 마음에는 그저 기특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애 뿐 아니라 호주에선 매해 학년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구입을 놓고 부모와 자식들 간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개는 부모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복과 체육복, 가방, 심지어 신던 구두조차도 후배들에게 물려주어 재활용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용토록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 시작을 앞둔 1월 초순경에, 더 이상 필요 없는 교과서나 교복 등을 팔고 싶어 하는 학생들로부터 수거하여 일정한 값을 매겨 신학기 준비물 기간동안 판매를 대행해 준다.

물건이 팔리는 대로 각 개인별로 집으로 수표를 보내주기 때문에 학생들은 되도록 빨리 새 임자를 만나게 하려는 조바심에 평소 사용할 때도 깨끗이 취급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 부모 마음으로는 자식한테 다른 것도 아니고 교과서 하나쯤 새 것으로 사주지 못하랴 싶지만, 만만치 않은 신학기 준비물을 생각한다면 보통 가정에서는 그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새 책으로 구입할 경우 과목당 5만원 내지 10만원을 훌쩍 넘는 게 보통이고, 여기에 교복을 비롯해서 학용품 및 기타 신학기 필요용품을 전부 합치면 한 자녀 당 최대 80만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이보다 덜 들지만, 호주에서는 1년간 필요한 수업 준비물 일체를 새 학년 새 학기에 한꺼번에 일괄 갖추도록 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목돈이 필요하고 형제가 여럿이다 보면 감당하기가 벅찬 가정이 많다.

그러다보니 되도록이면 쓰던 것을 물려받거나 비싼 값을 치루고 새로 산책은 절반이라도 건지기 위해 학생들의 신학기 용품 재활 습관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교과과정이 개편되어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학교마다 펼치는 책 물려받기 전통은 좀체 대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학부형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다.

한편 이맘 무렵이면 형편이 어려운 가정들의 새 학기 준비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도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펼친다. 평소 생활 곳곳에 알뜰살뜰 배어있는 이 나라의 재활용 문화가 이웃을 향해 보람과 빛을 발하는 순간 중의 하나로 재활용품 판매 대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반 가정에서 내다버린 생활 집기나 옷가지 따위를 모아 깨끗이 수선하고 정리 정돈한 후 재활용 가게를 통해 1~2달러의 값으로 팔아 모은 수익금의 일부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이나 학용품 구입비로 환원을 하는 것이다.

재활용 기금을 통해 고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년 50~100만원 정도를 보조 받으면서 학업을 마친 학생들의 경우 비록 액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 돈이 모아지기까지의 따스한 손길과 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푼을 쓸 때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감사를 표하곤 한다. 재활용품점은 또 신학기가 되면 시내 각 학교로부터 학생들의 작아진 교복이나 헌 가방 등을 수집하여 대대적인 할인판매에 돌입한다.

깨끗이 손질이 된 물건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잇점으로 인해 자녀수가 많거나 소득이 낮은 가정들을 단골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무엇이 되었건 자식들에게 최상의 것을 해주고 싶고, 학업이나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는 것에는 그 정성이 더욱 앞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로인해 학생들 간에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호주 학교처럼 빈부 구분 없이 아예 헌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전통으로 굳혀 버린다면 학생들이나 부모들이나 마음 언짢은 일 없이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선배들의 수고와 땀,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 있는 교과서의 갈피갈피를 넘기면서 앞서 걸어가면서 빠뜨린 공식이라도 있다면 뒷사람이 챙기며 따라가는 재미도 느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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