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대초원을 통일하다
12세기 후반까지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은 여진족의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지배 하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의 초원에도 통일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몽골의 역사서인 〈몽골비사〉를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또 하나의 세력이 몽골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민족적 코드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징기스칸을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표기하고 있다. 징기스칸의 'Khan(칸)'은 '왕'이라는 뜻이니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원 이름은 보르지기드 부족의 테무진[鐵木眞]이었다.
그는 부족 간의 싸움에서 아버지(애수가이)를 여의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으나 먼저 자신의 부족을 통합하고 나서 케레이트족의 왕칸, 자무카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주변의 부족들을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갔으나 1188년 테무진이 부족의 수장이 되자 왕칸과 자무카는 등을 돌리게 된다. 이에 테무진은 케레이트족을 치고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킴으로써 1204년에 전 몽골을 통일하였고, 1206년 몽골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징기스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 전체를 장악한 징기스칸은 전쟁 준비를 서둘러 전통적 부족조직과 연합체를 해체시키고 '천호제'라는 군사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다시 말해서 몽골 전체를 병영화 했다는 말이다.
대내외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징기스칸은 진군의 명을 내려 서쪽으로 나가서 티베트인이 세운 서하를 압박하여 조공 약속을 받아내는 한편, 금나라을 치고 아예 내친 김에 그들의 본거지인 만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금이 의외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동반도의 거란족들이 대요수국을 세웠으나 징기스칸의 군대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1216년). 이렇게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란족들은 한때 개경을 위협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고려의 김취려 장군 등에 의해서 강동성으로 내몰렸는데 그때 거란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고려에 합동 소탕작전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121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궁금증이 낳은 서역 진출
징기스칸은 원래 서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금나라를 먼저 친 이유는 서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우선 지난날의 치욕도 갚고 후환도 없애 버린다는 일거양득의 속셈에서 나왔다. 징기스칸은 서역과의 교역을 원했으므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동·서 무역의 본거지를 손에 넣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 징기스칸이 파견한 대상(隊商) 450여 명이 호라즘(Khorazm)에서 살해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징기스칸은 이 사건을 구실로 병력 20만을 이끌고 1219년 호라즘 정벌에 나서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였다. 호라즘은 중앙아시아 암 다리야 하류, 아랄 해 남방 지역으로 1077년부터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셀주크조를 대신하여 이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도를 우르겐치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호라즘을 정복한 징기스칸은 1225년 몽골로 귀환하여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다음, 계속 정복사업에 나섰지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서하 정복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원래 징기스칸은 영토 자체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복사업을 벌인 것이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이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였다. 서하를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지배하던 서하는 우선 인종적으로도 몽골인과 다르다. 분명히 서역 저편에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흥미로운 생활을 하면서 몽골인의 흥미를 끄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거란족, 여진족이나 송나라 사람들이나 고려인이나 얼굴 생김새가 비슷비슷하여 목욕탕에서 머리에 수건이라도 뒤집어쓰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지만 서역인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초원 저편,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 정벌에 나선 오고타이
당시 몽골의 주변국은 징기스칸이 죽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어 이제는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징기스칸이 죽자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정복사업을 계승하였는데, 그는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뜨는 정복 군주였다. 그는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을 국시로 선언하였다. 우선 오고타이는 제국의 수도를 현재 몽골 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서쪽 카라코룸으로 정하고 도로망을 정비하는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여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쿠릴타이의 공약(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에 따라 정복사업에 나섰다.
그런데 오고타이는 정복사업에 나서기에 앞서 고려를 침공하였다. 1219년 양국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바가 있었으나, 당시 오고타이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는 바람에 고려는 난감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1231년(고종 18년) 오고타이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최 씨 무신정권하의 고려를 침략하여 개경을 포위하였고 고려 조정은 화의를 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몽골군이 서북면에 무려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벼슬아치를 두고 철수하였다. 이는 몽골의 관리가 고려를 감독하겠다는 뜻이었다. 몽골이 먼저 고려를 친 이유는 그만큼 고려가 만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를 단속한 몽골은 본격적으로 금을 정벌하였다. 이 때 몽골의 요청으로 금나라 때문에 강남으로 쫓겨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南宋)이 지난날의 복수를 한다고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이것은 남송의 명운이 다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1235년 오고타이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자신의 야심을 추인해 줄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일찍이 징기스칸이 호라즘을 정복하였을 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심복 수부타이를 보내어 남 러시아를 정복케 한 바가 있었다. 오고타이는 유럽 원정을 위해서 전략에 뛰어난 조카 바투를 원정군의 총사령관, 수부타이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대군단을 출정시켰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유럽 원정군은 뛰어난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하여 볼가 강 상류의 킵차크, 러시아의 리아잔·블라디미르·로스토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카프카스와 키예프를 공략하였다. 무서운 몽골군을 피해서 킵차크와 러시아의 왕들이 헝가리로 도주하자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북으로는 폴란드, 남으로는 헝가리로 향하여 폴란드의 수도 크라코프를 함락시키고 독일 접경 슐레지엔까지 밀고 들어갔다. 위기에 빠진 유럽은 슐레지엔의 하인리히 2세의 지휘 하에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무서운 정복군단과 대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결국 연합군은 패배하고 하인리히마저 전사하고 말았으며 헝가리 방면으로 진군한 몽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여 쑥밭으로 만들고 바투 원정군은 1244년에 카라코룸으로 개선하였다.
이민족 최초의 중국 통일
당시 강남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에 대해서 몽골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몽골 제국이 오고타이 칸국·차가타이 칸국·킵차크 칸국으로 분열되어 각기 독립하였다. 그때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이었던 툴루이 가문은 영토가 원래의 몽골지역으로 한정되자 남송을 노리게 되었다. 몽골의 상속법으로는 막내아들이 가문의 재산을 상속하고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의 제4대 군주인 몽케칸(Mo..ngke Khan, 1251~1259)은 오고타이의 유럽원정 총사령관 바투의 지휘 하에서 전공을 세운 바 있는 인물로 그는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운남(雲南)·대리(大理)·티베트 등 남송의 주변국을 정복케 하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인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다른 세력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훌라구를 서역 페르시아 평정에 파견하여 일 칸국을 세웠다.
이후 몽케칸은 1258년 친히 남송을 치려했지만 1259년 진중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쿠빌라이(Khubilai)가 대칸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이미 중국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융합을 꾀하였다.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1270년 국호를 원(元)이라 하고 대도(북경)를 수도로 삼음으로써 원나라의 건국자가 되었고 중국풍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나아가서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과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인도·이집트·일본·동남아시아의 섬들 그리고 세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몽골의 직할령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는 고려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식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지방행정은 중국식 주현제(州縣制)를 따르지 않고 행성(行省)과 다루가치라는 몽골 특유의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 삼별초의 대몽투쟁
한편 고려와 몽골의 강화로 몽골 황제의 입조(入朝) 요구에 따라 중국에 가 있었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는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쿠빌라이를 택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 후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을 계기로 왕권강화를 위해 국왕이 직접 친조(親朝)하여 몽골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당시 집권세력의 반발을 샀다. 당시의 실권자 임연(林衍, ?~1270)은 원종과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와의 결탁에 반대하고 몽골과의 결전 의지를 다지면서 원종을 폐위시켰으나 몽골이 출병하겠다고 위협하자 원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해프닝을 벌였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 원종에 대해서 출두할 것을 요구하니, 두 번째로 원의 조정에 간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임연의 제거를 위한 병력파견을 요청하는 발언을 하였다.
원은 그와 함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임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원종은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어 삼별초의 개경환도를 명했다. 그러나 원종과 개경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반정부, 반원투쟁을 선언하고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삼별초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 ?~1271)은 강화도에 새로운 군주와 정권을 출범시키고 강화에서 진도로 옮겨가면서 대몽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삼별초는 본부를 제주도로 옮겨 자주 본토를 공격하면서 몽골에 대항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