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명재 윤증 가문

2007.01.01 09:00:00

충남 논산의 파평 윤씨 노종오방파는 명재 윤증과 같은 큰 선비를 키워냈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명재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서도 우의정의 관직을 받았으나 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백의정승, 곧 '관복을 입고 나간 적이 없는 선비 차림의 정승'으로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았다. 명재 이후에도 파평 윤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400여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 비결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원스톱 영재교육 시스템을 갖춘 종학당 건립에 있다.


최효찬 |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저자, 비교문학 박사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학교 건립
진 리프먼 블루먼은 인재를 중시하는 리더십으로 '관계지향적 리더십'을 들고 있다.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다른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돕는 데 보람을 찾는다. 여기에는 협력형, 헌신형 그리고 성원형 스타일이 있다. 협력형 스타일의 사람은 팀을 구성해 협력하며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헌신형 스타일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데서 진정한 만족을 얻는다. 성원형 스타일은 다른 사람들의 성취감을 북돋워 주거나 스승처럼 조언하고 자신이 동일시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업적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는다. 즉,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엄마형 리더십'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관계지향적 리더십은 다름 아닌 가문의 기획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덕목이다. 명문가의 초석을 닦고 자녀교육에 앞장선 가문기획자들은 통상 가부장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오히려 여성적인 엄마형 리더십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퇴계는 아들과 손자, 조카뿐만 아니라 형의 외손, 질녀, 형의 사위, 형의 손자, 조카의 글공부와 어려움을 힘닿는 대로 보살폈다.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지만 퇴계는 먼저 일가의 큰 어른으로서의 역할도 다했던 것이다. 퇴계는 맏형의 외손자가 공부를 게을리 하자 닭 한 마리와 생선을 보내며 학문에 힘쓰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가문의 CEO가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명문가로서의 위상과 명성이 달라질 수 있다. 파평 윤씨 노종오방파의 명재 윤증(1929~1724) 가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이 가문은 단순히 자녀교육에 그치지 않고 이를 체계화해 조선시대 최초로 사립학교를 만들었다. 즉, 명재가문은 이미 4백 년 전에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원스톱' 영재교육 시스템을 도입한 가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퇴계 이황이 자신의 가문이 아니라 후학양성을 위해 도산서원을 세운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퇴계의 경우 68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후학양성에 취지를 두고 도산서원을 설립해 300여명에 이르는 제자를 배출했다.

체계적인 교육 커리큘럼 마련
명재가문의 경우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문중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립 문중학교인 '종학당(宗學堂)'을 세워 후손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공교육으로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사립학교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양반가는 대부분 스승을 두고 과외를 했는데, 명재가문은 당시 사교육의 폐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문중학교인 종학당을 설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00년을 이어오는 명재 윤증 가문의 자녀교육 비결은 가문의 전통을 세우고 자녀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가문의 기획자'에 있었던 것이다. 명재가문에 교육의 토대를 놓은 이는 명재의 백부인 동토 윤순거(1596~1668)로, 이 가문의 인재산실 역할을 해온 종학당을 세운 사람이다. 윤순거는 노종오방파의 정신적 전통과 인물양성에 기틀을 다진 인물로 종학당을 건립하고 서책과 기물을 마련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가문의 규칙을 마련한 주역이다.

종학당은 관학인 성균관과 대조를 이루는 사학(私學)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요즘의 초·중·고와 대학이 함께 있는 종합캠퍼스와 같다. 10세 아이부터 과거를 보는 청소년들까지 연령과 학문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는 당시 서당 등의 교육현실에 비춰보면 크게 진일보한 것이다. 종학당은 동토의 아우인 윤선거와 윤선거의 아들인 명재가 차례로 학장에 오르면서 본 궤도에 올랐고 명성을 크게 얻었다. 종학당은 문중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인근에 사는 청소년들도 입학할 수 있었다. 즉, '가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토는 근대적인 교육체계가 없었던 당시에 가문 차원에서 체계적인 자녀교육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만든 '사교육의 기획자'였던 것이다. 동토 윤순거는 아우인 윤선거와 함께 가문의 규칙인 종약과 가훈을 만들었다. 종약에는 종학당의 교육지침과 운영에 관련된 내용도 들어있다. "바야흐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어릴 때 교양이 바르지 못하면 어리석고 어둡게 되는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이제 약 10세 이상의 자제를 모두 한 당(堂)에 모아서 스승을 세우고 글을 외우게 하고 읽게 한다. 학업과 학예를 갈고 닦게 하여 반드시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윤순거가 종학당을 세우며 이같이 후학에 전념한 것은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 귀양살이를 하고, 숙부인 윤전(尹火全)이 세자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 벼슬을 지내다 강화도로 피난갔다 순국하는 등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윤순거는 벼슬을 사양, 향리에 은거하여 종학당을 세우고 후학들을 교육하는데 전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집안내력이 윤황-윤순거-윤증으로 이어지면서 향리에 은둔하며 후학양성에 힘을 쏟는 가풍이 생겨났다. 명재는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 4대에 걸쳐 임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정승에 오른 역사상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의 학문적 세계는 양명학파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명재는 양명학자로 강화학파를 형성시킨 정제두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0여 명의 과거합격자 배출해
종학당은 명재가 백부 윤순거와 부친 윤선거에 이어 3대 학장(당장)에 부임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선비교육과 함께 과거시험 준비가 모두 종학당에서 이루어져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명성이 높아지며 학생들이 늘어났고 150년 후에는 동토의 5대손인 윤정규가 건물을 더 지어 확대 개편했다. 종학당은 조선후기 들어 최고의 명문사립대학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종학당의 규정이 적혀있는 종법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종학당의 운영지침을 마련해놓고 있다. 종학당은 일반서원이나 서당과는 달리 교육과정과 목표를 설정하고 철저한 규칙과 규율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파평 윤씨 가문의 종인들 대부분이 종약의 규율아래 체계화된 프로그램과 엄격한 규칙에 따라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종법에는 공부의 근본인 독서에 대해 독서의 의의, 독서의 순서, 독서의 방법 등으로 나눠 자세하게 강조하고 있다. 독서는 예나 지금이나 공부의 기본이지만 독서에도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종학당은 교칙이 엄격했다. 여기에는 일용(日用, 하루에 할 일)·야매(夜寐, 밤에 잠자는 것)·지신(持身, 몸가짐의 방법)·사물(四勿,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독서지서(讀書之序, 독서의 순서)·독서지법(讀書之法, 독서의 방법)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먼동이 트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 부모의 처소에 가서 안부를 여쭈어야 한다. 밤에는 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고 밤에 잘 때에는 부모님께 밤새 안녕하시기를 여쭙는다. 요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할 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1564년경 야트막한 니산(泥山) 아래에 터를 잡은 파평 윤씨 일가가 명문가로 우뚝 서고 또 자녀교육 문화를 주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종학당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교육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에 전주 이씨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성씨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가 기록돼 있는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따르면, 조선 건국이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00여 성씨에 1만 4624명이 합격했다. 이 가운데 전주 이씨가 844명을 배출해 가장 많고 파평 윤씨 412명, 안동 권씨 359명, 남양 홍씨 324명, 안동 김씨 310명 등의 순이다. 종학당은 1646년 설립된 이후 과거가 폐지될 때까지 4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고 시호(諡號, 죽은 뒤에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이름)를 받은 인물이 9명이다. 특히 윤황, 윤선거, 윤증은 3대가 모두 시호를 받았다. 한 가문에서 이같이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실용적 학풍으로 시대 앞서가
명재가문의 특징은 백의정승 집안답게 실용적인 학풍이다. 종학당은 이재(理財)에 대한 과목을 개설해 토론하는 시간을 별도로 가졌다. 지금으로 보면 17세기에 이미 경영학을 가르친 것이다. 또 유교사회의 폐단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사의 허례허식을 개선해 제수품의 수를 줄였다. 당연히 제사상도 작은 것(68×99)으로 바꾸었는데, 이런 전통은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예학을 중시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명재가 집안의 부녀자들이 잦은 제수품 준비로 너무 혹사당한다며 간소화했다고 한다. 요즘 표현으로 대학자인 명재는 페미니스트였던 것이다.

명재의 9대손인 이은시사(離隱時舍) 윤하중(尹昰重)이 천문학을 연구한 것도 실용을 추구하는 가풍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명가의 종손이 천문학을 연구했다는 것 자체도 눈길을 끌지만 더 파격적인 것은 천문학을 연구한 윤하중은 음력설 대신 양력설을 지내고 모든 행사를 음력이 아닌 양력을 기준으로 치르는 전통을 만들었다. 심지어 출생신고도 양력으로만 한다. 아직도 음력설을 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다. 윤하중은 연구에 그치지 않고 〈성력정수(星曆正數)〉라는 천문학 책을 펴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그는 1년 동안 1분의 시간이 느리게 계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1년이 365일 5시간50분인데 365일 5시간49분으로 계산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용적인 가풍에 따라 요즘도 명재 집안에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대신 공대출신이나 기업경영자, 의사 등 실용적인 학문이나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명재의 실용적인 가풍을 이어 후손가운데 두 명이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 올랐다. 한국야쿠르트 창업주인 윤덕병 회장은 명재의 8세손이다. 윤 회장은 전문경영인이 소신대로 회사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일체 경영에 간섭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35년 동안 대표이사가 단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전문경영인이 소신 있게 일하는 회사로 키웠다. 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때도 대리인을 참석시켰다. 마치 명재가 임금이 불러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웅진 그룹 윤석금 회장도 이 집안 출신이다. 윤 회장은 기업에서 인재육성에 대한 철학과 고집으로 '인사 파격'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을 많이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종학당에서 인재를 키웠듯이 윤 회장은 기업을 이끌고 갈 사장을 키워내는 데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다. 매년 여름방학 때면 명재의 후손들은 종학당에 모여 명재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른바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문중교육의 전통이 수십 년째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매번 400여명이 교육을 받는다. 400년 전에 자녀교육을 체계화한 가문답게 자녀교육의 지침을 담은 〈훈강〉이라는 교재도 매년 새롭게 만든다. 선비정신을 실천하며 '파평 윤씨 주식회사'의 방향을 정립한 윤순거, 윤선거, 윤증 등 가문 CEO들의 가르침은 아직도 후손들의 정신 속에 깊숙이 남아 마음의 등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녀교육을 위한 여성적 리더십
흔히 유럽의 귀족들이나 명가에서 자녀교육을 언급할 때는 언행의 신중함과 절제미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명문가에도 명재가의 경우처럼 엄격하고 철저한 규율이 존재했고 종법이라는 문서로 체계화되어 전승돼오고 있다. 명재가문은 근대적인 교육체계가 없었던 당시에 가문 차원에서 체계적인 자녀교육 커리큘럼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대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도록 했다.

퇴계 이황이나 청계 김진, 명재 윤증 등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요즘 지식사회의 감성시대에 각광받는 관계지향적 리더십, 즉 여성적인 리더십으로 지속가능한 가문경영의 초석을 쌓았다. 오늘날에는 이들처럼 아버지가 엄마형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자녀교육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자녀교육에 열정을 가진 극히 일부 아버지들에게 해당되고 있다. 대부분의 가정은 어머니가 직장일이나 비즈니스로 바쁜 아버지를 대신하면서 자녀교육의 CEO로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른바 '대치동 엄마'들처럼 자녀교육에 열정적인 어머니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요즘에는 가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섬세하고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엄마형 리더십이 각광받고 있다. 학교교육을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여성적 리더십이 한 몫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임할 경우 기존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는 오히려 자녀교육도 못하고 부자관계마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들도 섬세하게 보살피고 이끌어주는 엄마형 리더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500년 전에 가문의 기획자들은 이미 그런 리더십을 발휘해 새 세상을 열었다. 이제 자녀교육에 나서는 모든 아버지들도 엄마형 리더십으로 무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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