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교사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다. 담당 교과를 잘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고 적성 찾기, 창의체험, 봉사활동 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세계 최초로 인성교육진흥법까지 제정돼 ‘사람 만들기’의 책임 또한 무거워졌다. 방과후학교 부담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제는 돌봄교실까지 생겨나 보육 기능마저 책임져야 할 상황에 처했다.
변화에 대한 가혹한 요구
일선 교사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 사항은 이처럼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돌아오는 보상과 관련해서는 어두운 소식이 더 많은 것 같다. 공무원연금을 손보려 하면서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이가 급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줄어들고, 부담은 훨씬 더 커지니 모든 일을 손에서 놓고 싶은 심정이 교사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이해가 될 법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요구들이 비단 교사들에게만 가혹하게 다가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변화에 대한 요구는 기자들에게도 상당하다. 취재 잘하고 기사만 잘 쓰면 인정받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온라인 독자’, ‘클릭 수’가 중요해지는가 싶더니 지금은 ‘디지털 퍼스트’ 시대라며 페이스북이니, 트위터니 SNS에 대한 대응을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기사 아무리 잘 써봐야 SNS에서 통하지 않으면 ‘말짱 헛수고’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고 산다.
세상 인연 모두 끊고 산속에 들어가 ‘안빈낙도’의 삶을 청하지 않는 한, 사회에서 타자들과 좋든 싫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한, 우리는 사회의 변화 속도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일정 정도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35년 뒤 벌어질 ‘초초초고령화 사회’
사회의 변화 속도와 관련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가 ‘인구 절벽’ 문제다. 통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G20 통계 상황판’이란 배너가 있다. 1990년 우리나라 노령화 지수는 20이다. 0~14세 인구가 65세 이상 인구의 5배가 많다는 의미다. 노인은 많지 않고 아이들이 넘쳐나는 사회다. 2015년 이 지수는 94인데, 100에 가까우므로 아이들 인구와 노인 인구가 엇비슷하다는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럼 35년 뒤인 2050년에는 이 숫자가 얼마로 바뀔까. 자그마치 376이다. 전 세계 노령화 ‘톱’이다. 2위인 일본(292)보다도 100 가까이 더 높다. 376의 의미는 노인 인구가 아이들 인구보다 4배 정도 많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별로 없고 노인들은 넘쳐나는 ‘초초초고령화’ 사회인 셈이다.
기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60명 정도가 오글오글 모여 있었다. 사실 교육을 받았다기보다 관리를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반에서 공부 잘하는 5명 정도만 선생님들로부터 예쁨받았고, 중간 정도 성적이면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성적 나쁜 하위 20% 아이들은 ‘문제아’ 취급을 받았었다. 그런데 2050년에도 이런 식이면 어떻게 될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생계가 위태로울 수 있다. 별로 많지도 않은 아이들을 다시 줄 세우고 문제아 취급하는 순간 생산성이 떨어져 노인들은 아마 기초연금도 기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은 말해 무엇하랴.
‘한정된’ 인적자원 속에서 ‘인재대국’을 이루려면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한정된’ 인적자원이나마 최대한 능력을 극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를 소중하고, 귀중하게 다뤄야 한다. 그건 아마도 ‘국·영·수 입시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꿈, 끼, 재능, 적성, 소질을 살려주는 ‘맞춤형 교육’일 것이다. 그렇게 인재가 넘쳐나는 ‘인재대국’이 돼야 1인당 GDP 4만 불, 5만 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은 절망스러운 미래를 희망으로 바꾸는 일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이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인재로 만들어 우리의 미래를 밝게 만들어 주실 분들이다. 출산 파업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교육의 패러다임도 국·영·수 입시중심에서 진로·적성, 창의·인성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는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부모,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상당한 ‘체질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는 건 힘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는 곧 암울한 미래를 뜻하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사회의 변화 요구에 기자도, 교사도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자세가 절실한 시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