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理想)과 우상(偶像) 사이

2017.09.01 00:00:00

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가 출연자에게 ‘이상적인 이성(異性)’에 관해서 물어 본다. 이런 질문에 청산유수로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이상(理想)’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에 품는 이상이란 그런 것이다. 쉽게 구체화 되지 않기 때문에 이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구체성을 다 포괄하기 때문에 ‘이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의 내용을 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상적인 사랑을 묻거나, 이상적인 소명을 묻거나, 이상적인 인생을 묻더라도 시원시원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진행자는 득달같이 추가 질문을 한다. 도와준답시고 묻는 말이, 이상적 이성이 연예인으로 친다면 누구를 닮았는지 묻는다. 여기서 이상의 실체를 대지 못하면 그 출연자의 이상은 없는 것처럼 무시된다. 대개는 아무개 배우, 아무개 가수, 아무개 아이돌(idol)이라고 대답을 한다. 거기서부터는 이른바 ‘이상형’에 대한 현실적인 해부가 시작된다. 원래 품고 있던 이상형의 아우라(aura)는 언급될 틈도 없다. 이미 현실로 실체화된 그 연예인의 외모나 언행 등이 이상의 진면목인 양 이상을 점령한다.


이상을 쉽게 현실의 그 무엇으로 대체시키면 이상은 증발하고 왜곡된다. 이상의 자리에 욕망이 대신 들어서기도 하고, 이상의 자리를 이기심이 차지하기도 한다. 이상은 한갓 얄팍한 명예욕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이상이 세속 쾌락의 그림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워낙 돈의 위세가 강한 세태이니까 이상의 물신화(物神化)가 일어난다고나 할까. 흔히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내 스타일이니 아니니 하는 것도 이상을 왜곡시킨다.


원터치로 욕망을 충족하는 디지털 기계 문명의 매력을 ‘이상의 경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소비자들에게 ‘원터치 욕망 충족’을 유혹하며, 100% 즐거움과 만족을 보장하니 감동을 느끼시라. 우리는 오로지 감동을 드릴 뿐이다. 이렇게 감동 경영을 내세우는 방송 광고를 따라가노라면,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는 것 같고, 현실이 이상인 양 착각을 하게 한다. 언어의미론에서 ‘이상’은 ‘현실’과 대척되는 차원을 가짐으로써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개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대척의 균형이 무너지고, 이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음식의 이상(또는 이상적 음식 생활)’만 해도 그렇다. 텔레비전 채널 아무 데서나 등장하는 이른바 먹방(음식 먹는 방송)은 ‘먹는 일의 이상’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로지 식욕의 현실이 밀고 들어온다. ‘지금 여기’ 현존의 음식이 풍기는 감관의 유혹과 식욕의 역동성이 화면을 꽉 채우며 들이밀지 않는가. ‘먹방’이 대세인 세태를 따라가다 보면 현대인들의 ‘이상 없는 현실’, 그 민낯이 잘 드러난다. 구체적 현실을 이상처럼 여기다 보면 그 이상은 우상이 된다.


몸에 관해서 우리는 어떤 이상을 품고 있는가. 이상은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상태’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몸에 대해서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이상을 무엇으로 설정하고 있는가. 바람직한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몸의 이상(理想)’ 또는 ‘이상적인 몸’을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건강’이 이상적 몸의 우선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설령 몸매의 아름다움이 이상적인 몸의 조건으로 중요하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건강한 몸을 돕는 전제 하에서 ‘아름다운 몸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건강’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또 몸이란 인간 존재를 가장 실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어서, ‘몸의 이상’과 ‘몸의 현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현실이 과도하게 이상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하다. 오늘 우리는 몸의 이상적 경지를 ‘건강’보다는 ‘마르고 날씬한 몸매’에 두고 있다. 부작용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잘못된 것에 끌려서 그 잘못된 것을 이상처럼 받든다면, 그것은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상에 가까운 그 무엇이다. 우리가 ‘날씬한 몸매’라는 우상에 어리석게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영국 리버풀대 심리학과의 에릭 로빈슨 교수는 2017년 5월 국제학술지 ‘섭식 장애 저널’에 “의류 매장에서 사용하는 마네킹이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마른 몸매를 갖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패션업체들은 옷을 돋보이게 하려고 늘 마른 몸매의 모델과 마네킹을 선호한다. 연구진이 조사한 여성 마네킹은 정상적인 몸매를 가진 경우가 하나도 없었다. 여성 마네킹의 평균 몸매는 신체질량지수(BMI) 1~ 12중 1에 해당됐다. 이는 최저체중에 해당하는 지표이다.


호주 플린더스대 심리학과의 칼리 라이스 교수는 2017년 초 ‘보디 이미지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여자아이들이 바비 인형(바비 인형은 날씬한 몸매를 상징하는 인형이다) 때문에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여자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첫째 그룹은 바비 인형이 나오는 그림책, 둘째는 정상 체형의 에미 인형이 나오는 그림책, 셋째 그룹은 인형 없는 그림책을 읽혔다. 이후 자신의 몸매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보자 바비 인형을 본 아이들이 가장 낮게 나왔다(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chosun.com, 2017.5.16. 참조).


우리는 스스로 객관적 이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우상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마르고 날씬한 몸에 대한 우상적 믿음이 결국은 건강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이상을 현실에서 구하려는 데서 생긴 오류이다. 이상과 현실의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오류이다. ‘이상’의 사전적 반대어는 ‘현실’이다. ‘이상’의 왜곡된 추구에서 오는 ‘이상’의 반의어는 ‘우상’이다. 이상을 섣불리 현실로 대응시키지 말아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상은 순정한 추상형으로, 우리 가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맞다.


마음에 품는 이상을 두고 ‘청운(靑雲)의 꿈’이라는 말을 쓴다. ‘청운(靑雲)’은 글자 뜻 그대로는 ‘푸른 구름’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미 비유가 되었다. 마음에 품고 멀고 길게 바라다보는 이상의 위상을 비유하는 말이 된 것이다. ‘청운’이라는 말에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현실주의 출세관이 녹아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청운의 꿈’,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단 당혹스럽다. 그것을 이상의 차원에서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다. 상대가 자꾸 캐물어서 억지로 대답을 해 놓고 보면, 금방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답을 구체적으로 해 놓고 보니 내 ‘청운의 꿈’은 마치 추락한 날개처럼 초라하고 궁색하고 속되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지.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지금으로서는 무어라 딱히 ‘이거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냥 그걸 마음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 내 마음에 힘과 소망이 솟아요.” 그렇다. ‘청운의 꿈’은 그냥 ‘청운의 꿈’으로 알아줄 때 훼손되지않는다. 이상을 당장 현실로 맞바꾸어서 말해 보라고 하는 데서 이상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세태가 대체로 그러하다. 이상주의자로 사는 것이 여간해서는 허용되지 아니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하늘에 있고 현실은 땅에 있다. 하늘을 잡아당겨서 당장 땅에 닿게 하고, 땅을 띄워 올려서 하늘에 갖다 댈 수는 없는 것이 이치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를 순환하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주의 섭리이다.


‘구원(久遠)의 이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 이를테면 순수, 사랑, 화평, 정의, 성(聖), 자유 등의 말들이 왜 그토록 그 뜻이 아득하기만 한 추상명사로 존재하는지를 마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추상어는 현실에 오염되지 않는다. 추상어는 그 안에서 숨은 생성력을 가진다. 그리고 추상어는 오래도록 우리에게 일관성 있는 추동력을 준다. 왜 그런가? 이상은 지평선과도 같다.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물러나 가닿을 수 없는 저편에 또 다른 지평선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이상이다. 가슴에 이상을 품을 일이다.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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