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가요대상⋅연기대상⋅연예대상이 황금시간대를 장식한 연말 TV였다. 그런 가운데 지상파와 종편 TV가 특선영화를 방송해 관심이 쏠렸다. KBS 1TV '역린', EBS '설국열차', JTBC '밀정', TV조선 '군도-민란의 시대'와 '히말라야' 등이다. 새해 첫날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EBS), '패딩턴'(KBS 2TV)이 전파를 탔다.
극장으로 달려가 연말대전을 치르고 있는 ‘강철비’⋅‘신과 함께-죄와 벌’⋅‘1987’ 등 신작 영화 관람에 동참하지 못했다면 꿩 대신 닭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중 눈길이 가는 건 ‘밀정’이다. 지난 해 10월 4일 추석특선으로 방송한지 3개월 만에 다시 소환(달리 말하면 재탕)되어서다. ‘밀정’은 2016년 9월 7일 개봉, 위 영화들중 가장 최신작이기도 하다.
‘밀정’(감독 김지운)의 관객 수는 750만 457명이다. 손익분기점 420만 명을 훌쩍 넘겼으니 흥행성공작이다. 극장을 찾은 관객 수만 거론한 것이니 IPTV, VOD, DVD 등 수익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직배사인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처음으로 제작⋅배급한 한국영화여서 썩 신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재탕질이라 폄하만 할 일이 아닌 이유이다.
‘밀정’은 1920년대 일제 침략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이 점은 일제 침략기를 다룬 또 한 편의 흥행영화가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2015년 7월 22일 개봉한 ‘암살’부터 2017년까지 ‘해어화’만 빼고 ‘동주’⋅‘귀향’⋅‘아가씨’⋅‘덕혜옹주’⋅‘밀정’⋅‘박열’ 등 일제 침략기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이 차례로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천만영화가 된 ‘암살’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일제침략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의 흥행실패를 깬 점이 그것이다. ‘암살’ 이전 흥행실패작들은 ‘라듸오 데이즈’⋅‘모던보이’⋅‘기담’⋅‘YMCA야구단’⋅‘청연’⋅‘아나키스트’⋅‘원스 어폰 어 타임’⋅‘마이웨이’⋅‘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등이다. 다만 2008년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만이 668만 명 넘게 관객을 동원했을 뿐이다.
특히 2011년 12월 21일 개봉한 ‘마이웨이’가 순제작비만 280억 원으로 그때까지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임에도 고작 214만 명 관객에 그친 쪽박사건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앞으로 일제침략기 배경 영화 제작이 어려울 것이란 확실한 우려를 낳기도 했다. ‘암살’이 그 점을 박살내버린 셈이 됐다.
이후 2016년 2월 개봉한 ‘동주’⋅‘귀향’이 흥행성공했고, ‘아가씨’⋅‘덕혜옹주’를 거쳐 밀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201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6월 28일 개봉한 ‘박열’이 그것이다.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려 손익분기점을 넘기진 못했지만, 7월 26일 개봉한 ‘군함도’의 관객 수도 자그만치 695만 명이 넘는다.
‘밀정’은 1923년 이른바 ‘황옥경부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역사적 인물인 의열단장 김원봉이 정채산(이병헌)으로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비교적 긴 140분 상영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이끄는 것은 황옥으로 나오는 이정출(송강호)과 의열단원 김우진(공유)이다. 그들이 상해에서 폭탄을 열차로 운반해오고, 마침내 터뜨리는 이야기가 제법 숨가쁘게 펼쳐진다.
이정출은 “윗놈들이 나라 팔아먹은” 시대를 살았음직한 정체가 뚜렷치 않은 인물을 표상한다. 이정출은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과 조선인이면서 ‘왜놈’으로 사는 하시모토(엄태구)나 의열단원이면서 밀정 노릇을 하다 김우진에게 척살되는 조회령(신성록)처럼 색이 분명치 않은 인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회색분자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경부로 살다보니 의열단원 김장옥(박희순)의 권총 자살을 보게 된다. 호형호제하는 김우진과 그의 동료 연계순(한지민)을 고문해야 하는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이정출 마음 깊은 곳에 조국이, 동포애가 살아 꿈틀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천만영화 ‘암살’보다 뭔가 덜 통쾌하긴 하지만,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것 아니겠냐”던 정채산의 이정출에 대한 믿음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우린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열단장 정채산의 독립에의 의지가 뚜렷히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게 일제 침략기를 산 그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진지하고 묵직한 메시지 못지 않게 미장센도 나무랄데 없다. 인력거⋅자동차⋅건물 등 1920년대 경성 거리라든가 은근히 긴박감을 갖게 하는 열차 재현이 그렇다. 기와지붕을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추격전, 열차와 경성역 앞에서의 총격전 등 실감나는 액션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말을 반만 해도 잘 알아듣네” 같은 유머감각 역시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해낸다.
약간 의아스러운 점도 있다. 이정출의 ‘상해작전’ 행보다. 하시모토는 수하들을 데리고 있는데, 왜 이정출은 부하 없이 혼자 움직이는지 의문이 인다. 새벽에 이정출⋅김우진⋅정채산이 만나 아침식사 겸한 술을 마신다. 큼지막한 술독을 다 비울 정도의 음주인데, 그러고도 바로 밤낚시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