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은 길고 구수한 만연체 문장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이다. 그의 성장 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은 그런 문체로 그의 성장 공간 안에 있는 시대와 역사를 응시하게 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넝쿨처럼 엮여진 만연체 문장의 매력을 만끽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그가 구사하는 긴 호흡의 울퉁불퉁하고도 유장한 문장에 실려서 독특한 인간적 향기를 머금고 형상화된다.
나는 1980년대 초반, 이문구 선생을 직접 나의 일에 모시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이문구 선생이 40대 초반쯤이었을 게다. 내가 근무하는 기관에서 개최하는 전국 단위 문학 백일장 행사를 가졌는데, 그를 심사위원으로 두어 번 모실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30대 초반의 문학교육연구자였는데, 선생을 만나고 모시는 마음이 요즘으로 치면 마치 유명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의 마음 같았다. 선생에 대한 기대와 호감이 마음에 가득했다.
백일장이 진행되고, 다 쓴 글들이 제출되고, 심사가 끝나고, 시상 행사가 이어졌다. 이어서 심사위원의 심사 강평이 있어야 했다. 행사를 진행하던 나는 이문구 선생께 부탁드렸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생은 심사 강평의 역할을 사양하시는 것이다. 그 사양이 제법 완강하여 나는 좀 난감해졌다. 사양하시는 이유를 묻자, 자기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해 보는 사양이 아니라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는 것이 아닌가. 공교롭게도 선생 대신 강평을 하실 만한 심사위원이 사정이 생겨 자리를 먼저 뜨는 바람에 어쩔도리 없이 선생께서 굳은 얼굴을 하고서 단상으로 올라가셨다.
선생은 자신이 이런 단상에 올라오면 하던 말도 못한다는 말로 서두를 떼었다. 말을 잘하지 못해서 심사 강평을 극구 사양했는데, 막무가내로 올려 보내는 바람에 올라오게 되었다면서,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고 전제를 하신다. 작가는 오로지 글로써 말하는 법이라는 말씀도 했던 것 같다. 전체 심사강평의 반 정도를 자신은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데에 사용하고, 남은 시간도 그저 평범한 소감 몇 말씀으로 띄엄띄엄 이어가셨다.
선생의 스피치는 선생께서 스스로 염려하신 대로 내용은 단출하고 분위기는 건조했다. 풍부한 생각과 경험의 맥락을 흥청흥청 모두 거느려 풀어내시는 선생의 문장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선생의 스피치도 그의 문장처럼 웅숭깊은 멋과 풍성함을 펼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선생의 글에서 받았던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그것에 맞추어 선생의 스피치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심사 강평이 아쉬울 수밖에.
그런데 그것은 그냥 내 생각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에 있던 나의 동료는 다른 느낌이었단다. 이문구 선생의 말씀이 작가다운 카리스마와 간결한 절제, 그리고 말로는 나타나지 않는 어떤 울림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동료는 교육학 전공이었는데, 이문구 선생의 문장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나와 달리 선생의 강평에 어떤 기대치를 미리 마련해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만족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로써 읽었던 유명 인사를 실제로 만나 그의 말을 들어보고서는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내 경우는 후자에 더 큰 실망을 느끼는 편이다. 말 잘하는 유명 인사에게 홀딱 빠졌다가 다른 날 그분이 쓴 글을 보고 실망하여, 이전의 호감과 신뢰를 철수시키기도 했었다. 글을 믿다가 말에 울든, 말을 믿다가 글에 실망하든, 문제의 본질은 같다. 그분의 잘못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볼 수도 있다. 대개는 내 쪽에서 미리 형성해 둔 기대치가 불러오는 착시(錯視)현상이 아닐까. 아니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
기대니 만족이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인간의 행복에 관여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 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대나 만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기대도 만족도 절대적 기준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우리 모두가 이제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옛날로 거슬러 갈수록 사람들 마음속에 지금보다는 안정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처럼 행복이라는 것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요동치는 시대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물질적 만족도와 기술이 주는 생활 일상의 쾌락 만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이 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현대의 인류가 지니고 있는 행복 관념은 대단히 불안정하며, 그만큼 어떤 복잡한 움직임(dynamics)에 지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인이 구성하는 행복을 일종의 유리 천장으로 비유한다. 그리고 그 유리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을 언급하는데, 그중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유발 하라리의 말을 더 들어보자. 심리적 수준에서 보면, 행복은 객관적 조건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내가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라리는 이렇게 예를 든다. 우리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와 기대가 일치할 때 만족한다. 객관적으로는 나쁜 상황이라 하더라도, 조건이 나아져서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면, 행복이 움직이며 다가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인류가 겪은 것처럼 조건이 확 좋아지면,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치가 높아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무언가 성취를 하면 할수록 행복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불만이 커질 것이다. 성취한 것보다 더 높은 기대치를 품게 되기 때문이다(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호모 데우스 58쪽).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뭐.’ 가끔 이렇게 마음을 먹고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마음씨
를 가지는 사람도 줄어들었고, 이런 마음씨를 알아주는 세태도 아니다. 이걸 마냥 착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오히려 공동체 마인드가 약하고, 사회성이 바르지 못하고, 사회적 정의에 당당하지 못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억울하게도 ‘비겁하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뭐’라는 마인드는 착하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인성으로 알아주었다. 그러나 이는 근대 이전의 인간상 즉, 자연 질서에 순응하며 소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인성과 도덕이 자리잡던 시절까지였다. 산업자본주의가 사회적 생태 환경이 된 근대에 들어서면 달라진다.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뭐’는 근대의 합리성을 몰각하는 전근대적 인성이 된다. 그래서 이런 인성은 비록 인습으로는 착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어도, 그것은 ‘논리적이지 못한 착함’, ‘우유부단한 착함’,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착함’, ‘주체가 사라진 착함’ 등으로 질타당하지 않았던가. 일찍이 1960년대 후반 우리 문학평단에서 흥부가 비판받고, 놀부의 자본주의 의식이 새롭게 부각되던 것이 그러한 질타의 비평적 시초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는 ‘착함의 본질’까지도 가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착함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주체의 자유의지가 있으면 그 착함은 여전히 가치 있고 도덕적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어, 그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어떤 이해(利害)가 엇갈리는 갈등의 상황을 만난다. 고민을 하던 그는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뭐’하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면서 그는 그 손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손해를 받아들이는 자신에 대해 정신적 자부심을 품는다. 그로 인해 갈등이 해소되고 공동체가 위기를 넘어서면,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은은한 도덕적 기쁨과 자존(自尊)을 느끼기까지 한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가 자신의 착함을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가식적으로 연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착한 인성을 ‘우유부단한 착함’,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착함’, ‘주체가 사라진 착함’ 등으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워낙 약삭빠르고, 그만큼 이익과 손해에 민감한 마음들로 서로 부딪치고 생채기 내며 사는 것이 지금 우리의 사회적 생태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지를 분별하는 일도 정말 복잡하고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