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 편지 - 즈믄 해의 봄을 지나

2018.04.05 15:18:21

신라 여류시인 설요의 시를 읽고


강마을에 봄비가 내립니다. 벚나무의 연분홍 꽃송이가 부르르 몸을 떨면서 꽃잎을 쏟아냅니다. 도서관 창가에 서서 비와 꽃이 섞여 떨어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독서동아리반 아이들은 저마다 책을 펴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읽고 있습니다. 겨우 다섯 명입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독서동아리를 모집하니, 책읽기는 재미없다고 고개를 돌리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이 동아리반에 들어왔습니다. ‘두고 봐라, 이 녀석들! 내가 독서반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독서반을 외면한 아이들에게 저 혼자 눈을 흘겼습니다.


동아리 활동이 있는 오늘, 어제 준비한 초콜릿을 하나씩 아이들에게 뇌물로 주었습니다. 책의 달콤함을 나타낸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며, 독서반이 아닌 녀석들은 부러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샘예, 요리반이 더 맛있는 거 마이 묵는다 카던데예?”

“... ^^; ”

 

독서를 초콜릿으로 유혹하려한 어리석은 선생과 요리반의 맛난 음식을 버리고 도서관으로 온 의젓한 제자가 모여 책을 읽고, 책을 이야기하고 글을 봄날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 한 권을 꺼내어 읽고 있던 명화가 종이를 꺼내 옮겨 적고 있습니다. 중얼중얼 읽고는 앞산의 진달래 몇 송이에 눈을 맞춥니다.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습니다. 봄비는 소녀의 마음을 적시고, 봄꽃은 소년의 눈빛에 분홍 연심 한 방울 피어나게 합니다. 감청색 교복을 입은 누나의 여린 목덜미와 배꽃 같은 하얀 웃음 때문에 말도 못하던 녀석은 엉뚱하게 옆 아이에게 시비를 겁니다. 붉어진 얼굴로 급식시간이면 밥을 먹다가 건너편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봄은 이렇게 자지러지듯 피어나는 꽃들과 도발적으로 다가서는 새잎 앞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집니다.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요즘의 젊은이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신라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여류시인 설요의 시는 전당시 全唐詩대동시선 大東詩選등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즈믄 해의 봄을 지난 오늘 강마을의 도서관에 앉아 그녀의 시를 읽습니다.

 

반속요(返俗謠) /설요(薛瑤)

化雲心兮思淑貞

구름 같은 마음으로 변화함이여, 맑고 곧은 것만 생각하도다.

洞寂寞兮不見人

골짜기가 쓸쓸함이여, 사람이 보이지 않는구나.

瑤草芳兮思芬蒕

기화요초가 돋아남이여, 마음이 울적해지네.

將奈何兮是靑春

앞으로 어이할거나 내 청춘을

 

깊은 골짜기에 핀 무수한 봄꽃과 봄풀 앞에서 청춘을 어쩌지 못하는 젊은 승려는 다시 오는 봄을 맞이할 자신이 없어 꽃핀 골짜기를 걸어 환속합니다. 설요(薛瑤)는 신라인으로 당() 고종 때 당나라에 건너가서 좌무장군(左武將軍)을 지낸 설승충(薛承沖)의 딸입니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고와서 소호(小號)를 선자(仙子)라 하였습니다.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낙망한 나머지 불교에 귀의하려고 출가하였으나, 6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고시체(古詩體)<반속요(返俗瑤)>를 지어 불계를 버리고 환속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시인 곽진(郭震)의 첩이 되어서 여생을 보내었다가 당나라 통천현(通泉縣) 관사에서 죽었고 전해집니다.


젊고 아름다운 승려 설요는 산 속에 피어난 눈부신 봄꽃을 보며 그 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세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앞으로 어이할거나 내 청춘을라고 말하여 다시 올 봄을 견딜 자신이 없기에 하얀 봄꽃이 날리는 길을 따라 봄풀을 밟으며 먹빛 장삼자락을 휘날렸을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잔치를 하듯 핀 남강 가 꽃들을 바라봅니다. 그 강나루를 걸어오는 봄과 봄꽃과 청춘을 생각합니다. 즈믄 해의 시간을 지나 신라의 시인 설요가 그렇게도 안타깝게 바라보던 봄이 와 있습니다. 저도 그녀처럼 봄의 유혹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겠습니다. 세포 하나하나 마다 새봄의 기운을 담는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이선애 수필가, 경남 지정중 교사 sosod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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