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가 만나 미래를 만들다

2018.05.28 10:07:06

국립서울현충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런 6월을 상징하는 날이 바로 ‘현충일’이다. 사전에서는 이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 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기념일(한국세시풍속사전/국립민속박물관)’ 
 
현충일을 정의한 문장에 비슷한 낱말이 이어진다. 호국영령(護國英靈), 그리고 순국선열(殉國先烈)과 전몰장병(戰歿將兵). 전몰장병은 6·25전쟁 등 전쟁에서 돌아가신 군인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사실, 두 낱말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생산적인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라를 지키는 것(호국)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순국)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까닭에 같은 날 이분들을 기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두루 통하는 현충일의 이념과 달리 이 분들이 목숨을 바칠 당시 상황은 모두 특별했을 것이다. 세상 그 자체인 자신의 목숨을 던지기로 결심했다면 정말 극단적인 상황에 맞닥뜨렸단 얘기다. 당연히 개인의 사정이 다르고 시대의 상황이 다르고 공간이 다른 상황일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호국과 순국에 이른 정신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국립서울현충원’은 추모의 장이기도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가진 장소가 된다.



국군묘지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우리나라 여러 곳에 현충 공간(국립대전현충원, 4곳의 호국원과 3곳의 국립 민주묘지가 있다)이 있다. 그 가운데 역사적인 내력을 살펴보기 좋은 곳은 동재기나루가 있다고 해서, 또는 구리빛 공작을 닮은 지형이라고 해서 붙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역사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육군에서 군묘지를 설치하는 것을 검토하다가 전체 국군을 위한 묘지를 만드는 것으로 논의가 변경됐다. 이에 따라 1955년 국군묘지관리소가, 이어서 1956년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돼 군묘지 운영에 대한 제도가 완성됐다. 1965년에 ‘국립묘지령’이 만들어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작동 국립묘지’ 시대가 시작됐다. 이때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안장 대상이 확대된다. 그리고 2005년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동작동 국립묘지 이름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됐다.
 
이런 내력을 거친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은 약 143만㎡(국립대전현충원은 약 322만㎡)로 애국지사 묘역, 임정요인 묘역, 국가 유공자묘역, 장병묘역(장군/장교-사병), 경찰 묘역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16만5000여 영령이 모셔져 있다. 이 중 10만4000여 위는 현충탑 안 위패봉안관에 봉안 됐고, 시신은 찾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7000여 무명용사는 납골당에 모셔져 있으며, 5만4000여 위는 묘역에 안장돼 있다. 참으로 거창한 규모다. 



무덤을 찾는 답사와 삶의 의미
 
답사에서 무덤을 찾는 일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경주나 부여의 고분은 물론 강화도에 있는 고려왕릉, 그리고 이미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40기의 조선왕릉은 유명한 답사 장소다. 또 윤관이나 정약용의 묘처럼 역사 속에 발자취를 남긴 여러 인물의 무덤도 답사 장소가 된다. 이처럼 무덤을 찾는 것은 고고학적인 관심, 또는 그 무덤 조성을 둘러싼 논쟁을 제외한다면 그 무덤의 주인공을 찾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일생을 몇 제곱미터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다. 비록 눈앞에 펼쳐진 묘역은 단순하고 또 반복되는 모양이라고 해도 무덤 앞에 서는 순간은 여느 문화재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 보고 들었던 그 인물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덤 주인공에게 삶의 변곡점을 만든 이유를 묻는 것은 꽤 흥미로운 체험이 된다. 
 
그런데 그런 무덤이 내 앞에 수 십, 수백을 넘어 수 만 기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적어도 여기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일이 될 것 같다. 다만,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 삶의 의미는 답사가 끝난 뒤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한 사람의 생애를 담은 무덤 답사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내 무덤을 찾는다. 단 한 번 살아갈 나의 삶을 돌아보는데 이미 한 생을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유익할 것인가.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삶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한 경우가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주인공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치열함으로 삶을 수놓은 경우가 많다. 후대 평가에서 금빛 치사가 더해지기도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핏빛이었을 그런 치열함이다. 물론 무덤의 주인공들이 우리에게 그런 치열함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삶에 지표가 되었던 원칙,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우리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 이다. 문득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 때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할 때 더 행복함을  느낀다는 말이 떠오른다. 



호국영령·순국선열을 만나러 가는 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답사를 가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역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 그 분들이 겪은 일은 남의 일이 아니며 그 분들의 죽음은 나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은 장병묘역이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나섰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이다. 개인의 삶을 일일이 살펴볼 수는 없지만 현재 대한민국 존재의 바탕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군대에 간다. 누군가는 전쟁을 겪고 누군가는 평화를 맞아 복무를 마치고 왔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여기 잠들어 있는 분들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또 안타까운 장소가 있다. ‘무후선열제단’이다. 여기서 무후(無後)는 후손이 없다는 뜻이다.  제단에 모신 분들의 일부를 살펴보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던 유관순 열사,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 이위종 선생,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대한광복군의 오동진 장군,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조소앙, 엄항섭 선생,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 의열단원이었던 나석주, 김익상 의사 등.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비록 후손이 없어 여기에 모셨다고 하지만 우리가 모두 이분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애국지사 묘역은 역사의 무게를 더욱 깊게 담고 있다. 13도 의병사령관 이인영 선생,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 일제강점기 친일 외교고문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 서울역에서 사이또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참여했던 우덕순 의사 등도 모셔져 있다. 삼한갑족으로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간 이회영 선생, 또 3·1운동에 참여했던 이종일, 이필주, 권병덕 선생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외국인 한 분을 만날 수 있는데 바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다. 3·1운동 중 일어난 제암리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며 늘 정의의 편에 서고자 했던 스코필드는 우리의 애국지사가 된 것이다.
 
임시정부요인을 모신 묘역은 그 성립과정에 눈길이 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있었다.(최후의 임시정부 청사를 경교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므로 많은 요인들은 삶을 중국에서 마쳤다. 투철한 역사학자이며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강했던 신규식 선생,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노백린 장군, 의정원의장이던 김인전 선생, 신민회 간부였던 안태국 선생은 모두 상해의 공동묘지인 상해만국공묘에 묻혀있던 분들이다. 그 분들의 유해를 국내로 옮겨 온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여기에서 본다. 최근에 옮겨온 5분을 포함해 묘역에서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국무령을 역임한 홍진, 이상룡 선생 등 모두 열여덟 분을 만날 수 있다.



사람과 사회·국가를 생각하는 6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역대 대통령과 함께 뜻밖의 인물도 만난다. 포항제철 회장으로 유명한 박태준(국가유공자 묘역) 총리도 있다. 이 공간이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을 지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현재의 대한민국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멀게만 생각했던 역사가 빈틈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그리고 역사의 한 단락으로 매듭짓기 전에 현재는 계속 움직여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 끊임없는 역사의 흐름을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개인이 모여 사회, 그리고 국가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역사를 보면 개인과 공동체는 긴장 관계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존재하기 어렵다. 사람과 사회, 국가와 민족을 다루는 역사 공부가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6월에는 조금 머리가 복잡해져도 좋을 것 같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의 일은 쉽게 풀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여행이야기 박광일 대표, 심미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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