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을 읽고

2019.02.18 11:18:48

몇 해 전 모 방송사의 주말 대하드라마 ‘장영실’이 큰 인기였다. 미천한 노비로 태어나 조선을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강국으로 만든 그의 삶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민낯을 발견할 수 있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개방적으로 인재를 등용한 세종의 혁신적 리더십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 지도 자세히 알 수 있다.

 

특히 세종16년 6월 24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정말 획기적인 시계였다. 그 이전의 물시계는 낮에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한밤중에는 빨리 움직이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로 인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비로소 국가표준시가 결정되었다.

 

시대와 인물의 극적인 만남

 

조선이 장영실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하마터면 그런 천재성이 초야에 묻혔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분적으로 불리해서 주목받기 힘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의 조상은 중국인이었다. 8대조 장서(蔣壻)는 12세기에 살았던 송나라 사람이다. 이 시대에는 송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가 부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앞의 송나라를 북송, 뒤의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격동의 시대에 장서는 전쟁을 피해 고려로 망명해 충남 아산에 정착한다. 이것을 계기로 장서는 아산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

 

장영실은 고려 멸망 2년 전인 1390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양반이었지만 어머니가 기생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동으로 노비가 되었다. 그래서 장영실도 동래현에서 공노비 생활을 해야 했다.

 

동래현에서 장영실이 담당한 일은 무기제작이었다. 당시는 한반도 해안과 동지나해에서 왜구의 활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해안 경비가 매우 중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해안가인 동래현에서 무기 제작에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시대 분위기에 맞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손재주가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장영실은 한양으로 스카우트되었다. 그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그는 상의원에 배속되어 의류, 보석, 무기 등을 제작했다. 그런 그를 과학기술자로 바꾸어 놓은 것은 바로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1421년 장영실을 명나라에 파견했다. 그곳의 천문관측시설을 둘러보고 돌아와서 똑같이 모방하라는 것이 세종의 명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견학을 돕고자 명나라에 공문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이렇게 세종의 관심과 지원을 계기로 장영실은 과학기술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획기적인 신분 해방

 

세종은 단순히 장영실의 견문을 넓혀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노비신분까지 해방시켜주었다. 오로지 과학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신분을 해방시켜주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고을 사또보다 높은 정5품 벼슬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과학연구와 생계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면서부터 장영실은 과학기술 개발에서 놀라운 성과들을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자격루다.

 

소설 ‘장영실’에서는 장영실이 소현옹주와 소위 썸을 타는 장면이 묘사된다. 드라마 속에서도 소현옹주는 남편과 사별한 뒤 장영실을 은근히 좋아하며 과학연구를 도와준다. 또 장영실의 사촌형인 장희제가 장영실을 견제하고 훼방을 놓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허구로 지어낸 것들로 현실적으로 왕의 누나와 사랑을 나누고 사촌형제와 갈등을 빚을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기한테 기대를 걸고 있는 임금을 위해서라도 장영실은 과학연구에 온 정신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은 자격루, 옥루, 일성정시의, 현주일구 같은 객관적인 성과물들로 잘 증명된다. 신분적 제약에 관계없이 그를 발탁한 세종도 대단했지만, 임금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열심히 연구한 장영실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와 장영실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행운이었다.

 

치명적인 실수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1442년이었다. 당시 세종은 46세이고 장영실은 53세였다. 장영실은 세종이 탈 가마의 제작을 책임졌다. 바로 이 가마가 부서진 것이다. 세종이 승차한 상태에서 가마가 무너졌던 모양이다. 당시 세종은 체중이 너무 과한 편이었다. 세종의 체중 변화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가마를 제작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장영실은 관직을 빼앗기고 법정 최고형인 곤장 100대를 선고받았다. 만약 세종에 의해 감형 받지 못하고 곤장 100대를 다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세종은 그동안 장영실의 공적을 감안하여 공직에서 내쫓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 후 장영실이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장영실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과학자였다. 그는 노비신분에서 종3품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겨우 가마 제작에서 범한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관직을 빼앗기고 곤장을 맞은 것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자신의 과학적 명예가 일순간에 무너졌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천재과학자 장영실은 그렇게 비통함 속에서 여생을 살다가 쓸쓸히 죽어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선과 후손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김동수 충남 서령고 교사, 수필가, 여행작가 su94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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