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에서 책읽기-현실을 직시하는 비판적 사유

2019.06.04 09:28:56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초롱꽃이 자주색과 흰색으로 잘랑잘랑 소리를 낼 듯 피었다. 가마니 몇 장 정도의 화단에 ‘어리석자의 정원’이라 이름 붙이고 벌개미취 모종 몇 개를 구입하여 한 쪽에 심었다.

 

이곳은 여름의 기세가 등등하고 줄기에 껍질 벗겨진 배롱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초롱꽃 옆으로 노랑 루드베키아가 강렬한 시선을 뿜어낸다. 어슬렁어슬렁 좁은 아파트 화단을 거닐며 초롱꽃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무처럼 풀처럼 내 사유가 뇌세포 어딘가 숨어있는 엽록소를 찾아 광합성으로 깊게 익어가길 소원하며.^^

 

몇 주 전 이정우 선생의 오래된 에세이집을 중고서점에서 보석처럼 발굴하였다.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접했던 어떤 사람이 노란 색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은 흔적이 책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재야의 철학자로 들뢰즈 연구의 일가를 이루는 그의 철학에세이를 그 어떤 사람의 뒤를 이어 행복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예리하고 깊었다. 그는 지식인의 정체성에 대해 학자는 ‘진리’를 찾는 사람이고, 지식인은 ‘진실’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학자의 개념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학자 즉, 철학자는 이 세계를 총체적이고 근원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 역사를 이해하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원인, 근대 이후에는 철학은 갖가지 과학들로 분절되면서 과학자가 탁생한다. 일정한 영역을 잡아 실증주의의 바탕 위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반면 그는 지식인이란 현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이 말은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에밀졸라를 비롯한 많은 문인, 언론인, 학자 등이 기존 세력에 대항해 하나의 전선을 구축하였을 때 지식인의 개념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지식인이란 기득권에 맞서 형이상학적 가치와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학자, 예술가, 언론인 등의 집합체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전통에서 지식인은 선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왕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아픔을 대변해 주는 선비의 모습에서 그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그 후 군정 독재에 저항한 많은 이들에 의해 그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살아있는 사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사유이며, 비판적인 사유를 말한다. 사유란 사건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건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건이란 한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현세계의 지평 위로 솟아오른 존재이다. 운동장의 깃발이 흔들린 것도 사건이다. 그러나 사회적 맥락에서 작은 사건들이 어느 날 교차해서 발생하는 것이 큰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 우리에게 그것을 해석하고 대처하기 요구하게 된다. 사건이 현세계의 지평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 그것은 의미의 장, 가치판단의 장, 욕망과 권력의 장 속에 들어서는 것이다.

 

의미는 사건들의 계열화를 통해 형성된다. 의미란 사건들의 이어짐과 더불어 형성되는 탈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다. 의미란 사건들로부터 형성되기 보다는 사건과 더불어 형성된다.p33

 

결국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지만, 진실은 보려면 볼 수 있는 것을 그러나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것이다. p35

 

유월의 초입, 산자락에 있는 아파트 창으로 비릿한 밤꽃내음이 밀려온다. 내 사유는 끝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만든 의미로 충만해 있다. 이 의미들이 계열화된 장이 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이정우 지음, 산해, 2000

이선애 수필가, 경남 지정중 교사 sosod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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