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의 붉은 9월을 보내며

2019.09.30 09:11:41

코스모스가 삽상한 바람에 한들거린다. 갈색 그리움이 창가에 서성이다 찻잔 속에 툭 떨어진다. 9월이 저만치 가고 있다. 태풍 지난 뒤 흰 구름 사이 청잣빛 시린 하늘 아래 만개한 꽃무릇의 붉은 물결이 가을 햇볕을 붉게 태우며 구구절절 추억을 불러온다.

 

꽃무릇, 흔히 상사화라고 하는 이 꽃은 중국에서는 비단과 맞바꿀 귀한 꽃이라고 해서 환금화로 부르며 일본에서는 열반 언덕에 피는 꽃으로 피안화라 부른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은 붉은빛 애틋한 사랑을 홀로 간직하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탁 소리에 실려 산사의 가을을 불러 세우는 꽃무릇. 잎은 꽃을 위하고 꽃은 잎을 위하여 서로를 위해 비켜선 화엽불봉초(花葉不逢草)이다.

 

꽃무릇 하면 몇 가지 여운이 손을 내민다. 가을 초입 꽃무릇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산사 주변 이다. 등줄기에 여울진 땀이 말라갈 때 산사의 푸른 동종소리 멀리 추억을 소환하며 비췻빛 서정을 몰고 온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길, 만남을 위한 열정으로 피어난 그리움에 애간장이 녹는 애틋한 사연. 그 깊고 아픈 사연은 뿌리에 모여 방부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절집의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들이 탱화를 그릴 때 사찰과 불화를 보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로 꽃무릇의 뿌리를 사용한다.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나 벌레를 예방하기 때문이다.

 

잎 하나 달지 못한 숨바꼭질 사랑이 붉게 타오르는 꽃무릇, 인적 드문 산사지만 그래도 찾는 이가 있다. 그건 호랑나비도 아닌 오로지 검은 제비나비이다. 깊은 산속 절간 어떻게 꽃무릇의 개화를 알았는지 팔랑거리며 매달린다. 사랑의 염원을 이루지 못해 환생한 화신인지 짧은 생 짧은 비행으로 만족한다.

 

한 몸 한 뿌리에서 나와 일평생 꽃과 잎이 해후하지 못하지만 불가에서는 이 꽃무릇을 만수사화(曼殊沙華)라 한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내리는 만수사화의 꽃비가 바로 이 꽃무릇이라고 한다. 평생을 만날 수 없는 애틋한 그리움이 넋으로 피어난 석산화, 긴 기다림의 꽃술을 보며 천상에서나 상봉의 소원 이루기를 간절하게 두 손 모아본다.

 

잎과 꽃이 만날 수 없는 꽃무릇의 사연을 어루만지며 떠오르는 다른 이야기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무당 딸 월선이와 용이의 사랑이다. 아마 월선은 죽어서 꽃무릇이 되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용이는 제비나비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월선이와 용이의 사랑은 정말 애간장이 녹는다. 목적이 없는 오직 사랑뿐인 두 사람. 죽을 것 같이 사랑을 했지만 부모의 뜻을 어기지 못해 마음에도 없는 강청댁과 결혼한 용이는 언제나 월선이를 잊지 못한다. 월선이 또한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로 갖은 세파를 견디며 차가운 섬진강 바람 이는 겨울 포구에서 나릿선 내리는 사람을 눈 꼽으며 언제나 용이를 기다린다.

 

"나는 니 없이는 못 살긴갑다.” 용이가 월선이를 끌어안고 눈물 떨구며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은 떳떳하게 가정도 꾸리지 못하고 고향에서도 맺지 못한 부부의 연을 저 멀리 간도에서도 맺지 못한다. 결국 월선은 용이의 품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지만 이루지 못한 그 사랑에는 처절한 인내가 녹아 있다.

 

월선이와 용이를 생각하며 사랑의 의미를 돌아본다. 사랑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사랑의 반전은 서로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통해서 자신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 사랑이 주는 가장 큰 가치이다. 자기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것,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경지가 바로 꽃무릇의 사랑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이다. 금지되었기에 활활 타올라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한평생 파란 많은 삶을 살아야 했던 월선이의 사랑! 꽃무릇보다 더 붉은 사랑이 아닐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 몸뚱이란 것 외에 서로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운명적으로 피어난 꽃무릇, 수행자의 마음을 담아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고 간절한 소망을 비는 천상낙원의 꽃이 석산화이다. 그리움의 넋으로 피어나 애절한 사연을 담는 9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루는 꽃무릇, 지고 나면 이듬해 봄 다시 잎이 피어나고 잎이 죽고 나면 석 달 동안 숨죽인 피안의 땅 저편에서 그리움의 꽃을 준비하는 형벌을 받은 꽃이다.

 

군락을 이루어 그리움의 언어가 파란 여백을 채우는 하늘 아래 바닷가 남해 앵강 다숲에는 붉은 꽃무릇 물결이 스러지고 있다. 이제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아름다운 미소 속에 아픔 다 숨긴 그리움의 붉은 물결을 볼 수 있으리라.

장현재 경남 해양초 교사 qwe85a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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