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톨킨’과 ‘루소’

2019.11.05 10:30:00

01

영화 ‘톨킨(Tolkien)’을 보았다. 단조로운 듯했지만 나는 이 영화의 은은한 톤(tone)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톨킨(J.R.R.Tolkien, 1892~1973)의 청소년기 성장의 시간을 진지하고도 차분하게 카메라의 눈으로 연출한다. 톨킨이 누구인가. 유명한 <반지의 제왕>을 쓴 영국의 작가 아닌가.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로서의 재미가 압도한다. 그 재미에 몰입하면서 우리는 이별의 슬픔에 대한 공감에 들고, 믿음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구하려는 주제에 다가간다.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은 상징과 창의성이 넘친다. 작품 안에 다양한 신화를 녹여 냄으로써 얻는 효과이다. 언어학자인 톨킨은 여러 민족의 고대 언어들을 연구하며, 신화를 연구한다. 작가로서의 언어 문화적 내공이 단단함을 보여 준다. 그는 신화가 지닌 ‘문화적 상징’의 원형(archetype)을 소설 안에서 풀어내어, 마침내 인류적 성찰을 주제로 일깨운다. 그의 판타지작품은 그 어떤 현실주의(realism) 문학보다도 세계의 총체성을 잘 보여 준다. 그 어떤 본격문학보다도 인간의 욕망과 내면을 잘 비추어 준다. 2001년 피터 잭슨이 감독·각본·제작을 맡아서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는 크게 성공하였다. <반지의 제왕>의 문화적 힘과 가치는 이제 세계인의 공유물이 되었다.

 

나는 영화 ‘톨킨’에서 나만의 감명을 받는다. 그것은 오묘한 정신적 경험의 지경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내가 경험한 나의 성장과 내 청춘의 시간을 영화 ‘톨킨’ 안에서 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경험했다기보다는, 내가 경험하고 싶었던 성장기 정신의 풍경이 거기에 있는 듯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경험한 것’과 ‘경험하고 싶은 것’이 같이 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늘 ‘이상적 지향’으로 꿈꾸었던 나의 청춘과 성장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이상적 지향’이라고 해서 꽃길뿐인 인생 경로를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톨킨은 겪는다. 어려서 부모를 잃는 결핍과 외로움, 기쁘고도 고통스러운 사랑의 경험, 권위주의 억압과 저항, 자유를 향한 방황과 좌절, 미숙한 지성의 부끄러움, 경쟁과 희생과 고뇌로 뒤덮인 우정의 뒤안길, 전쟁과 처절한 실존, 비극적 운명과 대결하는 슬픈 자아 등등, 그런 행로에서 느껴지는 인생론적 의미가 아름답고 소중해 보였다. 저런 장면의 정서들이 나의 생애에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런 생각이 고일 틈도 없이 영화의 화면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게 아쉬웠다.

 

02

영화에서 나는 톨킨의 성장과 생애적 격동을 보았다. 그로 인한 톨킨의 환희와 고통을 나의 성장 실제에서도 비슷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껏 나의 청춘에서 별 의미 없이 겪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도 아름답고 소중했던 성장의 자질들이 고스란히 비치어 있음을 보았다. 영화가 그런 촉매작용을 했다. 물론 톨킨의 성장과 학창 경험 그 자체에 비하면 내 것은 옹색하고 구차스럽다.

 

그러나 경험 그 내면을 흐르는 청춘의 열망이나 비전,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 등은 톨킨의 것과 나의 것이 다를 바가 없으리라. 영화는 그런 각성을 나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다른 감상자들의 평을 인터넷에서 둘러보니, 내 느낌과 같지만은 않았다. 인상적인 감명을 받았다는 사람은 다수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대했던 재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 나름대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이 영화를 <반지의 제왕> 후속편처럼 생각하고 판타지 수준의 재미를 기대 지평으로 두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아닐까. 그런 기대 맥락을 가진다면 영화 ‘톨킨’은 좀 심심하고 지루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언뜻 밋밋하고 지루해 보이는 인생사(人生事) 같지만, 그 밑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시간’과 ‘운명의 공간’을 깊숙이 읽을 수 있는, 그런 재미를 일깨운다. 거기까지 가려면 약간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03

톨킨에게서 사랑의 이야기를 주목해 본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톨킨 형제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헌신적이고 자애로웠던 어머니는 톨킨이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고아로 남겨진 톨킨은 후견인 프랜시스 신부의 도움으로 어떤 귀족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같은 고아의 처지로 와 있던 ‘이디스 브랫’이라는 소녀를 만난다.

 

사춘기 소년 톨킨은 그녀에게 이성애(異性愛)의 감정을 품지만, 그럴듯한 연애가 되기에는 난관이 많다. 버밍엄 고교 시절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 브랫과 사귀지만, ‘개신교 여인과 부도덕한 연애를 한다’는 프랜시스 신부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디스의 총명함과 아름다운 자존감도 톨킨을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을까. 둘은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듯 지낸다. 친구들이 두 사람의 연애 감정을 놀리기라도 하면, 톨킨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 우긴다. 그러다가도 톨킨은 다른 친구가 그녀에게 접근하면 감출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을 보이기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은 이어진다.

 

청년이 된 톨킨은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강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마침내 다른 남자와 약혼하고 톨킨을 떠나간다. 톨킨은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전선으로 가기 위해 승선하는 부두에서 극적으로 그녀를 만나서 사랑을 고백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이별일 듯 다시 만나며 맺어지는 이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요약하면 이렇다. 톨킨은 전투에서 부상하여 후송되고, 이디스는 약혼을 깨고, 부상한 톨킨에게로 돌아와 그를 지성으로 돌본다. 전쟁에서 친구들은 죽고 흩어진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해로한다. 1973년 톨킨이 죽는다. 그보다 2년 앞서 이디스가 세상을 떠난다.

 

영화 ‘톨킨’을 보면서 200년 앞서 살았던 루소(Jean-Jacques Rousseau, 1671~1741)를 떠올린다. 그가 쓴 <고백록>에 나오는 루소의 첫사랑 이야기가 생각난다. 톨킨과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이다. 아니, 다른 이야기이지만 비슷한 주제인지 모르겠다. 이 대목을 읽으며 충격을 느끼던 나의 젊은 시절도 겹쳐서 떠오른다.

 

루소도 불우했다. 천재적 재능을 지녔지만, 어린 시절은 톨킨만큼 불우했다. 루소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다. 가난한 시계수리공이었던 루소의 아버지는 먼 친척뻘이 되는 어느 백작의 집에 루소를 맡긴다. 마침 그 집에는 루소와 똑같은 처지로 와 있던 고아 소녀가 있었다. 남의 집에 맡기어져 있기는 했지만, 소녀는 반듯한 기품과 매력을 지닌 듯했다.

 

루소는 고아 소녀에게 이성애를 품고 다가간다. 그러나 그녀는 루소에게 좀체 곁을 내어 주지 않는다. 쌀쌀맞고 냉정하다. 그 점이 루소를 더 끌어당겼을까.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자라났을까. 그 애틋함을 전할 방법이 없다. 엄격하고 통제된 집안 공간이다. 둘은 달리 소통의 기회나 공간을 가지지 못한다. 소녀의 진심 또한 알아볼 도리가 없다. 어느 날 루소는 백작의 방에 들어갔다가 백작이 아끼는 귀중품을 충동적으로 훔친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귀중품이 없어진 걸 알게 된 백작은 격노하며 범인을 찾는다. 백작의 총애를 받던 루소는 백작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안다고 말한다. 루소는 그 소녀가 훔치는 걸 보았다고 말한다. 루소도 자신의 무의식을 비난한다.

 

고백록은 적고 있다. 불쌍한 소녀가 추궁 받는 동안,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갈등하지만, 그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백작은 소녀를 죄인으로 낙인찍어서 내쫓는다. 루소의 첫사랑은 이렇게 비극적 단절로 끝이 난다. 동시에 윤리적 파탄을 향하여 추락한다.

 

톨킨과 루소는 대조적 사랑의 경로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한 가지 요인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톨킨의 첫사랑이, 꺼질 듯 사라질 듯, 파탄에 이르지 않고, 건강하게 지탱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근대 학교’의 역할이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톨킨과 이디스는 사랑인 듯 아닌 듯 함께 배우고 활동했다. 연극 동아리도 하고, 독서도 함께하고, 축제도 함께했다. 근대적 합리성 위에 구축된 버밍엄 고등학교의 교정은 로맨틱하기도 하고, 엄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소에게는 ‘근대 학교’의 공간이 없었다. 합리적으로 공식적으로 소녀와 함께 활동할 수 있는 학교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근대란 무엇이었던가? 학교란 무엇인가? 두 개의 화두를 챙겨 본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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