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6년, 우리는 지금도 아픈데 일본은 ‘박제된 역사’ 취급”

2019.11.05 10:30:00

[인터뷰] 이원렬 일본 센다이 한국교육원장

“일제 36년의 고통은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이지만, 일본인들은 박제된 역사로 인식하고 있어요.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거죠.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양국 간 교육교류도 대부분 중단된 상태다. 재일동포들의 민족정체성 확립과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재일 한국교육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꼬일 대로 꼬여버린 과거사 문제는 복잡한 일본의 속내와 맞물리면서 미래지향적 관계 설정을 더욱더 어렵게 한다.

 

이원렬 일본 센다이 한국교육원장(사진)은 “극우 성향의 인사들은 여전히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 사고에 빠져있고, 일반 시민들은 한국에 무관심하며, 10대 청소년들에게 한국은 그저 K-POP과 맛있는 음식의 나라로만 인식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상당수 일본인은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왜곡된 사실을 알고 있어 ‘사죄와 화해’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고 진단했다.

 

최근 한일무역갈등으로 일본에서 반한 또는 혐한 감정이 높아지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그곳 분위기는 어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소 잠잠해졌다. 한때 대부분 지상파 방송들이 한국을 다뤘다. 일부 정치인들이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한국정세에 관심이 많았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상당수 일본인은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후쿠시마 방사능 안전문제 제기 등에 피로감이 누적되어 간다고 한국에 불만을 터뜨린다. 또 센다이 한국교육원 주위를 돌며 확성기로 해이트 스피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본 지식인 중에는 한국인의 아픔에 대해 이해하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한국에 대한 정서는 무역갈등 이전이나 이후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일무역갈등 이후 한국교육원 활동에도 타격이 있는가.

“어느 정도 영향은 받고 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최근 사태 이후 한일 간 교육교류 행사들이 한국 측의 일방적 취소로 무산된 사례가 몇 건 있었다. 다만 일본 측도 ‘안타깝지만, 한국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분위기여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재일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정체성 교육활동과 현지인 대상의 한국어 교육 및 한국문화 보급 등 한국교육원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관광객이, 그리고 일본에서는 한국 여고생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곳 동포나 유학생들은 안전한가.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땐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30명 이상의 국비유학생이 생활하고 있는 여기 센다이의 경우 학생들의 생활에 어떤 불이익이나 피해, 혹은 불안한 분위기 조성 등의 변화는 아직 감지된 바 없다.”

 

한국은 아직도 상당히 화가 나 있는데 일본은 생각보다 무덤덤한 것 같다.

“전반적으로 일본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도 우리가 일본을 대하듯이 그렇게 큰 비중을 두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가며 맹렬하게 반응하는 성향도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비교적 자세하게 학습되어있는 반면 일반 일본인들은 잘 모르거나 무관심하다. 우리에게 일제 36년의 상처는 아직도 뜨거운 현재진행형이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 유적이나 박제된 역사로 여기고 있다. 이 같은 시각차를 어떻게 극복하고 그들의 잘못을 돌아보게 할 것인가, 선뜻 답을 찾기가 어렵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나 역사 왜곡에 대한 시정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역사 인식의 차이로 봐야 하나?

“솔직히 이곳 일본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한일 간 역사를 보는 관점이 우리와 달라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이들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 한일관계를 부분적으로 넣고 이해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한일 양국 간의 관계’로 이야기하자고 할 때, 이들은 세계사 안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로 접근한다. 일종의 ‘대동아공영론’이 깔려있는 역사관이다. 불쾌하고 염려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라면 한일관계에서 역사문제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될 것처럼 여겨지는데.

“아픈 시대를 살아갔던 세대는 양국에서 사라져가고, 전후 세대는 전혀 다른 교육을 받고 있으니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문제를 푸는 방법도 분쟁을 해결의 기본적인 프로세스 즉, ①양자 간의 사실 확인 ②그것을 근거로 한 가해와 피해 규정 ③그에 따른 사과와 보상 ④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과 기억이라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한일 양국 간에는 1단계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4단계까지 가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어쩌면 일본은 4단계를 미리 염두에 두고 1단계 조차 시작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한국교육원은 일본 청소년들과도 자주 접촉할 텐데 그곳 10대들은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

”일본의 10대들은 그저 선량한 눈빛으로 K-pop에 매료돼 한국노래를 듣고 댄스를 연습하고, 한국음식을 찾아다니며 맛에 감동하고, 한국어로 몇 마디 이야기하는 것에 즐거워한다. ‘한국이 왜 일본에 분노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한국은 활기차고 재미있고 맛있는 것과 멋진 스타들이 많은 가보고 싶은 나라이지 과거사 때문에 신경 쓰이는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지난 10월 5일 주센다이 대한민국총영사관과 공동으로 일본 동북지역 한국어변론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그때 발표자로 나선 한 일본 학생이 ‘한국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 과거의 이야기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어려운 회의는 쉬고, 과거의 일은 서랍에 넣고, 편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라고 하더라. 과거사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하는 우리의 무거운 입장과는 달리 너무 단순 명랑했다. ‘이런 아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마저 나왔다.”

 

일본에서는 혐한과 반한, 한국은 극일과 반일이 평행이론을 이룬다. 해법은 없을까.

“학창시절에 일본의 장점이나 본받을 점에 대해 들은 바가 거의 없다. 일본에 의한 아픔의 역사와 그것을 극복한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과 업적을 배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본의 미운 점을 철저히 분석하고 따지는 훈련만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일본을 상대할 때 냉철한 균형감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일본이란 껄끄러운 이웃을 곁에 두었고, 아예 이사 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면 어떻게든 상대를 잘 유인해서 상호 친선관계로 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감정적인 반일보다는 의연하게 우리의 지혜를 모아 피하지 못할 대책으로 상대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를 위해 좀 영리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접근했으면 싶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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