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심(無心)

2020.11.05 10:30:00

01

1950년대 후반, 내 초등학교 시절은 가난이 대한민국 전체를 관장하던 시대이다. 궁핍이 일반화한 생활 생태가 되니, 살기는 고단해도 마음이 불편한 일은 드물었던 것 같다. 너나없이 모두 가난했으므로 누구랑 비교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할 일은 적었다. 시골일수록 그러했다. 내가 자란 마을은 100여 호 되는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는데, 아침 등굣길에 보면 꼭 몇몇 아이들은 울면서 학교에 간다. 등 뒤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한탄인지 야단인지 모를 모진 고함을 뒤로하며, 학교를 울면서 간다. 눈물을 훔치며 집을 돌아보면, 가난에 찌든 어머니는 빨리 학교나 가라고 아이를 다그친다.

 

사정은 한결같다. 학교에 꼭 가져가야 할 학용품을 돈이 없어 못 산 아이들이다. 연필이나 공책이 없는 아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오늘도 이런저런 준비물을 못 가지고 학교에 간다. 도화지를 못 산 아이들, 물감을 못 산 아이들, 운동화를 못 산 아이들, 책값을 못 낸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돌아가며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다. 오늘은 앞집 아이가 그렇고, 내일은 옆집 아이가 그렇다. 조르는 아이와 졸라도 줄 돈이 없는 엄마 사이의 아프고도 딱한 실랑이가 아침마다 벌어진다. 생활고에 지친 엄마는 어쩔 수 없다. 이 사태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아이의 등짝을 때리고 밀어서 아이를 대문 밖으로 내쫓아 그저 맨몸이라도 학교에 가게 하는 것이다.

 

그때의 친구들이 어쩌다 모이면 그랬던 엄마를 두고 무심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다들 고생만 하시다가 가셨다고 안타까워한다. 오히려 어머니 쪽에서 ‘무심’을 꺼낸다. 고향을 지키는 친구 A가 말한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명절에 자식들 모이면, 이런 말은 자주 했지. “내가 너무 무심하게 너희를 키웠구나. 어미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너무 가난하면 마음이 있은들 그뿐이야. 무심하게 할 수밖에 없었지. 없어서 속상한 일에 일일이 마음 다 쓰면 나도 너도 다 마음이 견디지를 못해. 모른 척, 무심한 척하지 않으면 어쩌겠나, 아무런 방도가 없는데. 어미 무심하다고 탓해도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유심(有心)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무심(無心)이 놓이는 곡절을 이제는 자식도 너무나 잘 이해한다. 마음이 없어서 무심이 아니라, 마음이 무심 뒤에 숨는 것이다. 유심과 무심 사이 모성의 본질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유심’과 ‘유심’ 사이가 문제일 수 있다. 아무개 부모는 이렇게 진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를 챙겨준다. 아무개 부모는 얼마나 마음을 표나게 쏟는지 아이가 원하는 걸 다 해준다. 이렇듯 유심을 다투면, 유심은 한없이 얕아진다. 얕은 유심은 깊은 무심보다 못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무심의 미덕’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무심은 지혜의 영토에 든다.

 

02

한자어 ‘다완(茶碗)’이란 말은 낯설다. ‘차 다(茶)’자와 ‘주발 완(碗)’자로 이루어진 말이니, 차를 마실 때 쓰는 주발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다완(茶碗)’은 사발로 된 찻잔의 일종이다. 말차(抹茶 : 녹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를 개어 마시는 데 쓰이는 사발 찻잔이다. 다완은 원래 조선시대의 찻잔이었다. 형태가 소박했기에 서민들의 사발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재질과 공정의 만만치 아니함을 들어서, 그 쓰임과 가치를 다르게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일본의 ‘이도다완(井戶茶碗)’은 조선의 다완인 사발 자기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전리품으로 가져가, 이후 일본의 선불교와 연관해 찻그릇으로 사용되며 붙여진 명칭이다. 찻잔의 모양이 우물(井)처럼 속이 깊은 모양이라고 해서, ‘이도(井戶)’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16세기 진주에서 만들어진 사발이 일본 교토 대덕사의 한 암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이도다완은 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200여 점의 이도다완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게 3점,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게 20여 점에 이른다.

 

이도다완에 대한 찬미는 일본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글에서 절정에 이른다. “무엇 하나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 한 군데 꾸민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 아름다움을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무심한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과장이 없는 것”이라고 칭송했다.

 

나는 이 논평에서 특별히 크게 마음이 끌리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으로 ‘무심함’을 지적한 것이다. 무심(無心)이란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을 뜻하는데, 무심하다는 것이 아름다움의 한 자질이 된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아니 너무도 풍성한 해석이 숨어 있는 듯해서 나는 ‘무심’의 의미를 두고 유쾌한 긴장과 감흥을 느낀다. ‘무심(無心)’에 만만치 아니한 미학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도다완에 깃든 ‘무심의 표정’이란 무엇이겠는가. 미술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설명이 ‘무심의 미학’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말한다. 일본은 아름다움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내려 한다. 그래서 한국의 다완을 못 따라간다고 말한다. 무심의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려는 마음이 없다는 데에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한국의 다완은 ‘우리 것’이니, ‘나의 것’이니 하는 걸 내세우는 수준을 초월한 경지에 있다고 말한다. 즉, 세계적 보편(universality)의 경지에 있음을 말한다. 보편은 평범하다. 그 어떤 비범도 욕심내지 않으려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무심의 미학(무심의 미덕)’ 아닐까.

 

20세기에 들어 예술은 ‘개성의 표현’에서 미학적 진보를 추구하였다. ‘개성을 통한 보편의 추구’를 내세우지만, 이는 개성시대에 와있음을 달리 표현한 말이리라. 이에 비추어 보면, ‘무심함으로 이루어내는 보편’이란 참으로 그윽하다. 이도다완은 가장 평범한 표정, 어디에서나 허용되는 공감의 분위기가 있다. 보편의 넉넉함을 누리게 한다. 그것이 이도다완의 표정이다.

 

무심의 반대편에 유심(有心) 또는 유정(有情)이 있다. 무심이라고 해서 마음 자체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원래 인간은 유정한 존재로서, 변화무쌍한 마음, 감정 색깔이 무시로 바뀌는 마음, 이런 마음을 거느리고 산다. 그 마음에서 조용히 벗어나는 지점이 무심의 영토이리라. 나야말로 무심에는 무심했다. 그저 유심유정(有心有情)을 드러내기에 분주했다. 내 마음 안의 정회가 얼마나 각별한지를 어떻게든 알리려고, 특별히 드러내어 내색하고, 좋음을 이기지 못해 금방 반색하고, 싫고 미운 마음을 누르지 못해 내가 펴는 불편한 기색에 내가 눌려 지내기가 일쑤이었다. 나야말로 사발 다완을 가까이 두어 무심의 지혜에 다가갈 일이다.

 

03

북미 인디언 중 체로키 부족은 아들을 강인한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독특한 훈련을 한다. 성인식 통과의례로 아버지는 아들을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 아들의 눈을 가린 채 홀로 남겨둔다. 가족과 부족을 떠나본 적 없는 소년은 처음으로 혼자 밤을 지새워야 한다. 늘 보호막이 되어 주던 아버지인데, 오늘 밤은 소년 혼자 남고 아버지는 돌아간다.

 

홀로 견뎌 내는 공포의 밤이 힘들게 지나간다. 마침내 어두컴컴한 숲들 사이로 새벽이 온다. 아들은 이 훈련을 혼자 이겨낸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때, 먼 곳에서 아버지가 나타난다. 사실 아버지는 집으로 간다고 해 놓고, 지난밤 내내 아들 옆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들을 뜬눈으로 지켜본 것이다(따뜻한 편지 1663호, www.onday.or.kr).

 

아들의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아버지는 짐짓 무심함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 무심함 안에 유심함을 심어 놓는 아버지의 지혜를 볼 수 있다. 무심함 안에 유심이 살고, 유심함은 무심함에 기대어 성숙을 기하는 것이 아닐까. 원래 무심은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에서는 허망하게 분별하는 삿(邪)된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 미혹한 마음을 떠나온 상태를 무심이라 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을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한다.

 

우리는 그간 성공과 경쟁의 가치관에 지배된 시대를 살았다. 이를 비판하는 진보적 성찰의 목소리가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이 시대 부모 된 사람들이 자녀를 기르면서, 얼마간 ‘무심의 지혜’로 나아갔으면 한다. 일부 사람들이 내 자식 잘 보살피기에 과도하게 마음을 쏟아, 세상의 공정을 허물고, 세간의 비판을 받는다. 유심한 보살핌이 넘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자녀에게도 해가 될 수도 있다. 더러는 무심에 노출되어 자아를 스스로 추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심함에 당면함으로써 진정한 성장의 면역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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