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이 황제라는 표현은 익숙하지 않지만, 사실이다. 조선 말 갑신정변을 계기로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변의 실패로 중단되고, 아관파천 등의 위기도 겪었지만, 드디어 실행했다. 1897년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원구단을 세웠다. 황제즉위식을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했다. 황제의 나라를 세우고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상도 황제의 자리에 올린다. 조선 건국을 하고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가 조상을 목, 익, 도, 환조를 왕으로 추존한 것과 같이 고종도 고종의 양부인 문조, 조부인 순조, 증조부인 정조 그리고 고조부인 장조까지 4대 조상과 건국 시조 태조를 황제로 올렸다(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2월 23일). 이때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는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가 된다.
정조의 묘호는 원래 올바름으로 모든 사람을 감복(복종)시켰다는 의미로 정종(正宗, 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이었다. 남아 있는 실록 이름도 ‘정종대왕실록’이다.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선황제로 추존되었고, 이 과정에서 묘호를 종에서 조로 바꾸었다. 이때 익종(효명세자)도 전혀 다른 이름 문조라는 묘호를 받았고, 사도세자(장헌세자)는 장종으로 추존되었다가 바로 장조가 되면서 동시에 황제의 신분으로 전환된다.
고종이 이렇게 사도세자와 정조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가 있다. 우선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왕위에 올랐던 철종이 32살의 나이에 병사한다. 그는 부인이 8명 사이에 자식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했다. 왕위에 오를 자식이 없었고, 변변한 종친도 없었다. 이때 풍양 조씨 신정왕후가 이명복을 왕으로 결정했다.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 12월 8일(1863년)에 의하면,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흥선군의 적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으로 익종 대왕의 대통을 입승하기로 작정하였다.”하자, 정원용이 아뢰기를, “언문 교서를 써서 내려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발 안에서 언문 교서 한 장을 내놓았다.
사실 고종은 왕실의 핏줄에서 먼 일반 양반이었다. 순종실록부록 10권, 순종 12년 3월 4일(1919년) 고종 황제의 행장에 보면,
장조의 별자인 은신군 충헌공 휘 진께서 후사가 없어, 순조께서 명하여 인조의 별자 인평대군 충경공 휘 요의 5세손 진사 증 영의정 휘 병원의 둘째 아들 구를 후사로 삼고 작위를 봉하여 남연군이라 하고 시호를 충정이라 하였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 대원왕 휘 하응께서는 여흥 민씨 판돈녕 효헌공 치구의 따님을 취하여 임자년(1852) 7월 25일 왕께서 청니방의 사저에서 탄신하였다.
고종의 할아버지는 남연군은 16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군의 칭호도 받지 못하는 일반 양반이었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제사를 모시는 후손으로 들어가 겨우 남연군이라는 작위를 받았지만 역시 왕실 종친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이 은신군의 후손이었으니 왕통을 이을 마지막 혈손의 자격은 있지만, 이 또한 너무 약했다. 직계가 영조이니 고종은 고작 왕의 5세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왕위계승을 꿈조차 꿀 수 없다. 왕조 국가에서 왕위계승의 첫 번째 조건은 왕의 혈통을 타고나야 한다. 특히 왕의 아들이라면 높은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이를 극복한 것이 입양이었다.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효명세자(순조의 아들)가 있다. 정조 계통이자 사도세자의 3세손이다. 이명복(고종)은 사도세자의 또 다른 아들인 은신군 계통이자 사도세자의 4세손이다. 결국 둘은 공동 조상이 사도세자로 7촌 간이었다. 이 7촌 관계를 뛰어넘은 것이 입양이다. 신정왕후가 이명복을 효명세자 아들로 만들었다.
정조와 고종은 1752년, 1852년 정확히 100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났다. 영조가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로 정조를 입양하고 왕통을 잇게 하였으니, 둘은 양부의 아들로 즉위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비록 죽은 왕의 아들이었지만, 정통성이 취약한 이명복은 권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고종이 문조, 순조, 정조, 장조만 추존한 이유는 이들이 직계 선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임금을 하지도 않은 선대는 포함하고, 윗대 임금인 헌종과 철종은 제외했다. 다행히 이들은 나중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영조의 서장자 효장세자)과 함께 황제로 추존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선왕 정조대왕께서~’라며 연기를 하는 장면이 많다. 정조라는 묘호는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된 후에 생긴 묘호이므로 앞뒤가 안 맞는다. ‘정종대왕’이라고 해야 맞다. 사후에 정종대왕으로 불리다가 황제로 추존되며 묘호가 ‘정조선황제’로 된 것이니 고종 이전 시대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정종대왕’이 맞다.
조나 종을 쓰는 데는 꼭 일정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 종보다 조가 격이 높다고 생각하게 됐다. 선조, 영조, 순조도 모두 조로 고친 것인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왕이냐 대왕이냐의 논란도 오해가 있다. 특별한 업적을 남긴 임금은 대왕이 붙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왕이라고 한다는 말이 돈다. 세종과 정조는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라고 하고, 나머지 왕은 태종, 세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틀린 말이다. 세종이니 정조니 하는 것은 왕이 죽은 다음 올리는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인 묘호다. 이는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이름이다. 왕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료들이 짓는 존호다. 여기에는 모두 대왕으로 끝맺는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태조, 세조, 세종대왕, 정조대왕하는 것은 언어적 습관일 뿐이다.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은 특정 세력의 세도정치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왕권이 약했기 때문이다.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헌종도 아버지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때 헌종은 8세였다. 다시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을 왕으로 세웠다. 철종의 증조부는 사도세자고, 조부는 은언군이 다. 은언군이 강화도 유배 생활 중에 태어난 후손이다. 철종은 19의 나이에 왕위계승을 받았지만, 힘이 없었다. 결국 정조 이후 왕들은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정치 부패는 심했고, 백성들은 살기 어려워졌다.
역사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왕자의 출생이라도 제대로 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순조→헌종), 은언군(→철종), 은신군(→고종→순종)은 모두 왕위를 잇는 역할을 했다. 뒤주에 갇혀 27세에 일찍 죽으면서 아들을 두지 않았다면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까. 왕족 계보는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정조의 역사적 기억과 상상력은 화수분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정조는 수없이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흥미를 위해서 많이 각색된다. 물론 드라마와 영화를 사실로만 그리기 어렵다. 그렇다고 허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묘호 등은 바르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