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웅이 잠들어 있는 ‘크즐로르다’

2021.03.05 10:30:00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출발한 기차는 하루를 꼬박 달리고도 아직 크즐로르다에 도착하지 않았다. 도착 예정 시간을 서너 시간 남겨두고 지루해지려는 찰나, 작은 역에 기차가 멈춰 섰다. 아주 잠깐 정차한 기차는 다시 작은 역을 떠난다. 찬바람이 객실로 들어오고 잠시 후 아가씨 세 명이 내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외투에 묻은 찬 기운이 후텁지근한 객실을 잠시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크즐로르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각자 이름을 소개하는데 웃음이 피식 나왔다. 굴샷, 굴나라, 굴자나. ‘굴’ 시스터즈다. 카자흐스탄 여자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은 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아주 맛있는 해산물 이름이 굴이라고 하니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니 크즐로르다에는 한국인 영웅이 살았던 곳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영웅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고 했다. 소련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가 태어난 곳이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영웅이 살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굴 시스터즈 말고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영웅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혼벤도’라고 하는데 연관되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기차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가는데 굴 시스터즈가 따라왔다. 그녀들도 아직 혼벤도 거리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택시를 탔다. 굴 시스터즈가 가격 흥정을 했다. 기차역에서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혼(Хон)으로 시작되는 거리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집마다 러시아어 표기가 제각각이었다. 어느 집 앞에서 마주한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인들이 말하는 한국인 영웅은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아주 큰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이었다.

 

조금 호들갑을 떨며 굴 시스터즈에게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작은 소란을 듣고 이웃에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말하고 한국에서 온 한국인이라고 소개를 하자 홍범도 거리 끝에 가보면 그와 관련된 공간이 있다고 친절히 알려준다. 문 하나하나에 적힌 홍범도 이름을 눈으로 확인해가며 길 끝에 다다르자 회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벽 한가운데에서 아주 작은 간판을 찾았다.

 

‘이 거리를 1937년 극동지방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온 한국의 국민 영웅 홍범도의 이름을 붙입니다.’

 

 

 

 

 

 

 

간판 앞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보고 행인이 다가오더니 멀지 않은 곳에 홍범도 장군의 묘지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택시로 5분 정도 걸렸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묘소가 있었다. 묘소 앞에는 ‘통일문’이라고 적힌 대문이 서 있었고, 그 문을 지나자 한글이 적힌 묘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봉우 독립운동가와 그의 부인 김야간 여사의 묘지가 보였고, 그 옆으로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자리했다. 묵념을 하고 주변에 고려인들 묘지를 둘러보았다. 높은 억새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묘지 주변은 관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춥고 배도 고파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이제 그의 거리도 그의 묘지도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니 다시 찾아오면 된다. 그때는 국화를 몇 송이 미리 챙겨야겠다.

 

 

오늘 함께해 준 굴 시스터즈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기로 했다. 시내에는 한국 식당도 서너 군데가 있었다. 택시 기사가 안내하는 괜찮은 한식당으로 갔다. 식당 주인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겨울에 관광지도 아닌 이곳에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국인이라면 이곳을 지날 때 크즐로르다에 꼭 들러야 하지 않을까.

 

굴 시스터즈에게 맵지 않은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굴 시스터즈에게 굴 음식을 꼭 맛보여주고 싶었는데 카자흐스탄은 바다가 없는 나라다. 인터넷으로 굴 사진을 보여주니 처음 보는 음식 앞에 먹는 거냐고 묻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주인장께서 굴 음식에 관해 설명을 해주니 그제야 정말 귀한 음식이란 걸 알겠다는 표정이다. 김치찌개로 속을 데우고 나니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려고 한다.

 

 

저녁 기차로 크즐로르다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타면서 굴 시스터즈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오늘 꽤 추운 날이었는데 홍범도 장군을 만났고, 굴 시스터즈가 함께 해주어 견딜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다시 카자흐스탄을 횡단하게 된다면 홍범도 장군을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과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크즐로르다를 떠났다.

 

*편집자 주 :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카자흐스탄과의 협의에 의해 2021년 내 국내송환이 추진되고 있다. 이에 앞서 홍범도 장군과 같은 묘지에 있었던 계봉우 지사와 부인 김야간 여사의 유해는 2019년 국내로 봉환된 바 있다.
강석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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