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기다’와 ‘이기다’

2021.09.06 10:30:00

 

귀신 이야기에 끼어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귀신은 사람과는 무관한 존재인 듯싶지만, 알고 보면 사람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인간을 존재론 차원에서 이해하려 할 때, 귀신의 존재는 불가피하게 끼어든다. ‘귀신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주제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에 언제나 따라붙는다. 그만큼 귀신 논쟁에 끼어들어 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대개 이런 귀신 논쟁은 공식적이라기보다는 비공식적인 논제로 우리 일상에 끼어든다.


대학 시절 나는 고향 독지가 한 분이 지은 장학 기숙사에서 지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 온 선후배들 30여 명이 서울로 와서 함께 지내던 기숙사이다. 서로 허물없이 생활하는 기숙사였다. 그때 우리는 밤에 심심풀이 삼아 비공식적인 토론을 벌였는데, 그 주제 중의 하나가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본격 토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시작한 것이 제법 열띤 토론의 양상으로 이어지곤 했다. 


각기 전공이 다른 대학생들이라, 그럴듯한 근거와 가능성이 찬반 양편으로부터 동원되기도 했지만, 결말은 늘 우기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찬성편에서는 궁지에 몰리면 “내가 귀신을 직접 보았다”라고 주장한다. 반대쪽에서, “네가 직접 본 것을 너 외에 누가 객관적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느냐”고 되물으면, “내가 보았다는 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나를 거짓말쟁이로 보는 거냐. 나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냐.” 뭐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귀신 없다는 쪽에서도 “나는 귀신이 없는 것을 직접 보았다”라고 우긴다. “없는 것을 어떻게 직접 보느냐. 그게 말이 되느냐” 하고 되물으면, 찬성편의 말투를 빌려와서 그대로 되돌려 준다. “여기 있는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는데, 그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나를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냐. 섭섭하다.” 


어찌 보면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무 말이나, 말 안 되는 대로 해서, 웃기는 장면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물론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이것이 본격 토론대회도 아니고, 친구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작했던 대화라는 점에 있다. 굳이 공식적인 무게를 갖는 토론은 아니니까, 저런 우기기가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면 공식적이 아닌 토론 장면에서는 우기는 걸 인정해도 된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아무리 비공식 상황이라도 개그 행위가 아닌, 토론의 행위라면 ‘우기다’의 방식은 안 된다. 


그런데 이렇게 우기는 식으로 흘러가는 과정에도 두 가지 양상을 주목할 수 있었다. 하나는, 찬반 입지가 분명했던 만큼, 서로 질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했다. 강박은 처음에는 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졌다.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우기다’가 등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초반에는 비교적 합리적 근거와 사례들이 동원되었다. 상대가 제시하는 근거와 사례들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 하면서부터, 우기고 보자는 심리가 점점 커졌다. 

 

‘우기다’는 ‘억지를 부린다’는 뜻이 핵심이다. 억지를 부려 제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행동이 ‘우기다’이다(표준국어대사전). 억지는 아차 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우기다 보면, 상대에게 모욕이 가게 된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도대체 한국말도 못 알아먹습니까?” 우기기가 강해질수록 이런 언어폭력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우긴다는 것을 모른다. 즉, 잘못은 상대에게 있고, 자신은 옳으니, 당연히 우길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제는 신조어가 되다시피 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도, 그 행위의 바탕에 ‘우기다’가 작동하고 있다. 나(내 편)는 절대적으로 선하고, 너(상대편)는 악하니, 나는 너에 대해서 무조건 옳다. 이렇게 믿고, 행동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우기는 모습이 ‘내로남불’이다. 이미 나의 잘못과 억지스러움이 세상에 드러났는데도, 본인은 모른다. 실제로는 우기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우긴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기는 동안에는 반성이나 부끄러움은 생겨날 수가 없다. 그래서 ‘내로남불’은 아이러니(irony)의 모습을 띤다. 


‘우기다’는 윤리적으로도 함정이 많다. 내가 나를 속이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 들어 있다. 자신이 틀린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를 부려 자기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며 우긴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거짓이 이중으로 쌓인다. 그렇다면 자신이 틀린 줄 모르는 상태에서 억지를 부려, 제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것도 ‘우기다’인가. 전자와 후자를 같은 ‘우기다’로 다루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서 국립국어원은, 자신이 틀린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억지를 부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기다’라는 어휘를 쓸 수 있다고 했다(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왜 우기게 되는가. 이유야 많겠지만, 토론상황에서 보면, 주어진 문제(주제)에 대한 지적 준비도가 낮기 때문이다. 상대의 반론에 대해서 재반론을 하면서 새로운 근거나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상대의 집요한 공격에 대해서 새로운 프레임으로 탈출구를 만들지 못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우기다’의 전조 현상이 되는 것이다. 지적 준비도가 높은 사람은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에 눈을 뜬다.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언성을 높여 우겨야 할 필요가 없다. 


엘리자베스 크럼레이 멘쿠소(Elizabeth Krumrei-Mancuso) 미국 페퍼다인대학 교수가 국제학술지 <긍정심리학>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지적 겸손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참과 거짓을 잘 구분하고, 자기가 맞다고 우기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적다. 반대로 지적 겸손이 부족한 사람은 시시비비를 잘 가리지도 못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일이 많다(<박진영의 사회심리학>에서 재인용, 동아사이언스 2019.4.6.). 


정답은 오직 하나라고 교육받은 사람도 위험하다. 그도 역시 우기는 스타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대안이 없는 사람은 줄기차게 정답 하나만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정답 하나만을 고수하는 것, 그것이 곧 우기는 행동 방식을 만든다. 지식도 지식이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한 가지 방식으로 굳어지는 것, 그것이 곧 우기는 행동 방식을 만든다. 파주 신도시 신설 학교로 신규 발령을 받아 간 L 선생님은 5학년 담임을 맡아, 학급 급훈을 ‘그럴 수도 있지 뭐!’로 정했단다. 그렇다. ‘우기는 인간’을 키울 수는 없다.


‘우기는 사람’을 위한 변명은 없을까.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대체로 말할 내용을 두고 우기는 경우보다는, 말할 상대를 두고 우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즉, 그는 나로 인해서,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와 열패를 입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로 인해서 ‘의문의 일패(一敗’)를 여러 번 당했던 사람이다. 더구나 여러 사람 앞에서 당하였다면, 그는 내가 미웠을 것이다. 나에게 우겨서라도 이기고 싶었을 것이다. 

 

‘우기는 캐릭터’가 개성 있는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세태이다. 하지만 우기면 이기는 세상은 삼류 세상이다. 공정과 합리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우기는 이들은 잘못이 드러나도 부끄러움이 없다. 선거를 앞둔 후보자 캠프들은 우겨서라도 상대를 이겨야 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싸움이 치열할수록 ‘우기는 강경파’가 득세한다. 강경파에도 클래스가 있다. 메시지 내용이 강경한 것은, 오류가 아닌 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메시지 내용을 계속 우기며 강변하는 강경파는 안쓰럽다. 


‘우기다’는 정책을 위험하게 한다. 우기는 정책은 저절로 무너진다. 우기기 시작하는 순간 정책의 유연성과 합리성이 졸지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겨서 이기는 것은 그저 잠깐이다. 일시적 착시현상일 뿐, 지는 길로 가는 티켓을 예약하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어려움에 몰릴수록 우겨서라도 이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우기는 것만큼 중독성이 강한 것도 없다.


세상에는 ‘이겨서 우기는 일’도 많다. 이긴 것에 올라타서 온갖 갑질을 하며, 그 갑질을 정당화하는 데에 ‘우기기’를 부단히 사용하는 것이다. 이겼으므로 우길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믿는 것일까. ‘권력에 취했다’는 그럴 때 쓰는 표현이다. 취한 권력이 어찌 일어설 수 있을까.   다시금 생각해 보니, ‘우기다’와 ‘이기다’는 같이 갈 수 없는 운명이구나. 그렇구나. ‘이기다’의 반대말은 ‘우기다’가 되는구나!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 했다는데, 우기면 지는 거다. 

박인기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