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찾아왔다 하고 느끼는 순간, 행복은 떠나버린다고 했던가. 행복은 그 순도가 높을수록, 오는 것도 모르지만 가는 것은 더더욱 모른다. 행복은 왜 그래? 도대체 행복은 왜 그렇지? 그렇게 물어 봤자다. 바로 그래서 행복이라는 거다. 행복의 본질이 그렇단다. 나는 이 말이 행복의 행복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알아차린 행복, 사방에 노출된 행복은 그냥 그대로 ‘변치 않는 행복’으로 내 곁에 있기 어렵다.
복이 나를 찾아 주어야지, 내가 복을 찾아서는 복이 피해서 간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행복도 복의 일종이니 여기에 해당한다. 복을 다루는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다. 일단 어떤 복이 내게 들어오면, 우리는 그 복을 더는 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누려야 할 그 무엇이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나의 소유물일 뿐이다. 돈처럼 말이다.
복을 준다는 복권을 두고 생각해 보자. 물론 복권도 행복이 될 수 있다. 다만 복권을 사기로 마음먹는 데서부터, 복권을 사서 일등 당첨을 꿈꾸는 데까지만 행복이다. 실제로 일등 당첨되는 순간, 행복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후 인생이 행복의 꽃길로 걸어갔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복권 당첨이 화근이 되어 불행에 시달렸다는 사람은 많다. 배분을 놓고 가족이 불화하고, 더 큰 욕심을 부리다가 파산에 몰리기도 하고, 생긴 돈으로 허랑방탕 지내다가 가정이 무너진 경우도 적지 않다.
1908년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가 쓴 희곡 《파랑새(L'Oiseau bleu)》도 행복에 대한 유사한 인식을 담고 있다. 주인공 남매는 요정들과 함께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어려운 고비를 넘고서 파랑새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파랑새들은 이미 죽어 있다. 고난을 뚫고 여러 미지의 세계를 헤매어 보지만, 파랑새 찾기는 실패한다. 지치고 탈진하여 집으로 돌아온 남매는 놀라운 장면과 마주친다. 그간 집안 새장에 있던 회색 비둘기가 파랑새로 변해 있지 않은가. 그토록 찾았던, 바로 그 파랑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남매 주인공은 딸을 잃은 불쌍한 할머니에게 그 파랑새를 준다.
마테를링크는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무심히 스치기 쉬운 내 주변에 있다. 행복은 사소한 일상 안에 숨어 있다. 행복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한다. 인간의 욕망과 행복 사이는 늘 불안하다. 좀 비장하게 말하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이다. 어쩌겠는가. 진실로 행복해지려는 자, 욕망을 버려라. 행복하겠다는 욕망조차도 버려라.
아침에 샤워하면서 혼자 무심코 불렀던 노래를, 출근해서도 무의식중에 종일 흥얼거리고 있다. 이러고 있는 나의 ‘심리적 자아(정서적 자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는 내가 나에게 노래를 들려주면서, 내가 나를 쓰다듬는 마음 안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남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억압도 없는 자유와 ‘자재(自在)의 자아’가 있다. 마음에 자유가 차오르고, 그 마음 안에 화평과 조화가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복의 그림자가 잠시 내 마음에 비쳐든 것 아닐까.
행복은 이런 식으로 우리와 스치듯 지내며, 있는 것 아닐까. 이런 행복 인식을 두고 나는 ‘행복의 현상학(現象學)’이라 명명하고 싶다. 경험의 현상에서 길어 올린 행복, 그 행복을 만들어내는 순수 의식을 소중히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행복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마음의 순정한 작용이다. 그 순정함은 나 자신도 행복이 와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있다는 데서 행복의 정점을 조용히 만든다.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다. 이탈리아 레체에서 열린 <동양 정서학회>에 참가하고, 아테네로 왔다. 호텔에서 아침 샤워를 하며, 나는 어떤 노래를 흥얼거린다. 무심코 나온 노래이다. 아침 식당에서도,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계속 그 노래가 나온다. 동행인 최 교수가 묻는다. “기분 아주 좋으신가 봐요?” 최 교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기분 좋은 것 그 이상의 무엇이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안에 자유가 차오른다. 그 자유에서 오는 평화가 있고 조화가 있다. 딱히 여행에서 오는 기분이랄 수도 없었다. 노래 때문인 그 무엇이 있다. 나는 그때 그 노래를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그건 행복이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 일행은 코린트 남쪽 60km에 있는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에 도착했다. 기원전 4세기에 지은 이 유명한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은 거대한 좌우 대칭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지을 당시 좌석은 34단이었지만, 로마 시대에는 55단으로 더 높게 확장되었다. 이 극장은 자연 그대로의 소리 전달 효과가 뛰어나서, 음향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내는 육성을 극장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안내인은 우리에게 노래를 권하며 그 효과를 시험해 보라 한다. 나는 마침내 노래를 불렀다. 아침부터 웅얼거리던 노래를 그리스 에피다우로스 원형 극장에서 불렀다. 극장 계단 끝자리 띄엄띄엄 앉아 있던 이국의 관광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그날 내가 부른 노래는 이수인 선생이 작사·작곡한 가곡 ‘내 맘의 강물’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이곳 에피다우로스에 오기까지 흥얼거렸던 노래도 물론 ‘내 맘의 강물’이었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국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가장 아끼는 내 애창곡이다. 멜로디가 얼마나 정감이 있는지, 어디에서 불러도 사람들 마음에 정 깊은 강물로 흘러가는 음률이 된다. 가사는 또 얼마나 곡진하면서도 절제가 아름다운지, 부르는 내 감정이 조용히 올라와 울컥해질 때가 있다. 시간과 존재의 무상함, 사람 사귐의 유한함 속에서도 우리들의 유정함을 기약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그날 무엇이 이 노래를 아침부터 웅얼거리게 했을까. 그 노래는 왜 나에게 와서 어떻게 ‘행복’으로 스며들었을까. 그걸 어찌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정신은 참으로 오묘하다.
노래는 내가 행복해서 부르게 되는 건가. 노래 자체에 행복이 있어서 부르게 되는 건가. 어떤 마음의 순간에 서로 끌어당기는 것 아닐까. 그 어느 쪽이라 해도 노래에 몰입하여, 강물 같은 노래를 맘 안에 두면 행복하다. 도취 중에 가장 강하고 순정한 도취는 자기도취다. 자유에 기반을 두는 행복이란 적절한 자기도취를 요청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이수인 선생이 나에게 준 감화가 더없이 소중하다. 나를 선생의 노래에 눈뜨게 하여, 자유 감성의 자아를 발견하게 하고, 내 ‘마음의 밭(心田)’을 행복의 영토에 들게 해 준 분이다. 나는 ‘내 맘의 강물’ 이외에도 선생의 노래를 좋아한다. ‘고향의 노래’, ‘별’, ‘만월’, ‘석굴암’, ‘외가 가는 길’ 등은 내게는 이제 옴짝 없이 정이 든 노래들이다. 나는 선생과 어떤 사적인 만남도 인연도 없다. 오로지 노래를 통하여 그분을 아는 것이 전부이다.
이수인 선생은 ‘내 맘의 강물’을 비롯하여 150곡이 넘는 가곡과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방울꽃’, ‘아빠의 얼굴’, ‘목장의 노래’ 등 500곡이 넘는 동요를 만들고 가사를 붙였다. 그런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만큼 우리 애창 가곡과 동요도 메말랐을 것이다. 이수인 선생은 KBS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던 꼬마 조수미의 어머니에게 ‘춤’, ‘피아노’, ‘노래’ 세 가지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조수미를 ‘성악가’로 키우라고 조언한 결정적 멘토이기도 하다.(KBS 보도, 2021.8.23.)
얼마 전, 이수인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 내 마음 안에 행복을 고이게 하던 샘 하나가 사라졌다. 소천 소식을 접하며 그날은 얼마나 허전하고 아쉽고 쓸쓸하였는지. ‘내 맘의 강물’을 종일 가슴 안에 머금었다. 선생을 보내고 부르는 이 노래는 그 뜻이며, 곡조며, 감정들이 얼마나 너그러운 울림으로 살아나는지, 나는 조용히 울었다. 애도를 넘어서자 감화가 찾아왔다. 감사했다. 그는 교실 밖에서 국민을 감화로 이끈 훌륭한 스승이었다. 어찌 학교에만 스승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