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지도는 고통스럽다. ‘힘들다’는 표현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담아낼 수 없다. 대부분 아이들은 상식선에서 행동하며 교사의 지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상식선을 넘는 몇몇 아이들은 교실분위기를 흐려놓으며, 교사들과 힘겨루기를 한다. ‘일당백’, ‘골칫덩어리’의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잠이라도 자주면 고마울 지경이다. 지도를 한다고 말을 듣는 것도 아니고, 혼낸다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왠지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먼저 걸기도 싫은, 차라리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을, 이 녀석들과 어떻게 일 년을 버텨야 할까? 6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 녀석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해보자.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
“나, ○○○ 담임이야.” 한 마디로 상황이 종료되는 반이 있다. 나도 일 년이면 2~3명씩 만난다. 선도위원회가 열리기 전, 상담실에 온 아이들은 잔뜩 날이 선 채 내 앞에 앉는다. ‘귀찮으니까, 빨리 해치웁시다’라는 표정으로 상담실 구석구석을 힐끔거릴 뿐,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나를 힘겹게 하는 ‘비자발 상담자’. 마음을 굳게 먹고 이야기를 시도한다.
“넌, 왜 이렇게 까지 되었니? 언제부터 이랬니?”
다짜고짜 ‘훅’ 들어온 질문에 ‘뭐라는 거야?’라는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째려본다. 나 역시 ‘뭐, 어쩌라고’라는 눈빛으로 제압하며 맞선다.
“아니,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잖아.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인성지도부에서도 아무 말 못 했잖아. 혼만 나고. 지금 해봐. 네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너의 이야기.”
“얘기하면 뭐 달라져요?”라며 귀찮아하는 아이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주한다. 먼저 말을 할 때까지. 상담실에는 ‘비자발적’으로 왔지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이야기가 나온다. 정적을 깨고 아이가 묻는다. “상담 안 해요? 끝난 거예요? 가도 돼요?”
“끝나긴, 시작도 안 했는데. 나는 네 얘기가 듣고 싶은데, 네가 말을 안 하니까, 기다리는 거지. 너, 나한테 잔소리 들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잖아? 뭐, 잔소리해줘? 그런 거 듣고 싶어?”
어이없다는 듯, 나를 힐끔 보고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안타깝고 안쓰러운, 외롭고 힘겨웠을, 두렵고 공포스러웠을, 분하고 억울했을 이야기들을. 이런저런 추가질문을 하면서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그렇듯, 원인제공자는 대부분 자녀에게 강압적·폭력적이거나 반대로 관심이 없는 부모님이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아직 어려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비슷한 상황’의 패거리들과 몰려다니며 놀다 보니, 그냥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다. 크게 죄책감도 없다. 아빠 혹은 엄마만 아니었다면 자기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여전히 자신을 힘들게 하는 부모님과 관계개선할 마음도 없다.
학교생활은 그럭저럭 괜찮다. 집보다 낫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자기를 만만하게 보면서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니까.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규칙을 어기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편하고 좋다. 자기보다 힘이 더 센 선생님 수업시간엔 잠을 자면 그만이고, 만만한 선생님 수업시간엔 멋대로 행동한다. 이렇게 사는 자신이 한심할 때도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망한 인생이고, 별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내가 달라져봤자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괜한 노력을 하기보다 그냥 이렇게 살기를 선택한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즐겁고 재밌으니까.
아이들의 ‘문제행동’은 크게 기질적 반항행동과 우울성 반항행동 두 가지로 구분된다. 우울성 반항행동은 교육현장에서 지도가 가능하지만, 기질적 반항행동은 교육적 훈육으로 지도하고 상담을 한다고 해도 좋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 과감하게 병원으로 연계하여 정확한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병행해야 또 다른 문제상황을 막을 수 있다.
청소년 비행도 심하면 ‘병’이다
기질적 반항은 뇌신경계의 원인으로 나타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강압적 태도와 정서적 학대(방임 등) 등 고통스러운 상황에 장시간 노출되면 인간의 뇌는 ‘슬프고도 놀랍게도’ 스스로를 변형한다. 감정을 조절하는 뇌(변연계와 해마), 공포반응과 관련된 뇌(편도), 사회적인 인지나 보상과 관련된 뇌(안와전두피질)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채, 전 생애에 걸쳐 후유증을 남긴다. 감정에 무감각해지고, 충동성이 강해지며, 걸핏하면 화를 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는 등 비행으로 치닫는다. 특히 사춘기 시작과 맞물려 남학생은 10세~12세, 즉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 그 증상이 확연히 드러나며, 여학생은 14~16세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진다.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학생 중엔 행동도 행동이지만, 인격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학생도 있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즐거워하고, 충동적으로 폭력적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교사를 조롱하듯 대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행동은 사춘기 반항으로 보기에는 선을 넘는 행위이다. 그런 학생들은 이미 뇌기능이 변형된 기질적 반항일 가능성이 크다. 기질적 반항은 교육적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훈화지도를 해도 별 소용이 없다. 기질적 반항은 적극적 치료를 필요로 한다. 뇌가 완전히 성숙되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성인이 되었을 때 더 큰 사회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병원연계가 어렵다는 점이다. 본교의 경우, 선도위원회에서 학생의 병원치료 및 상담치료 3회 이상을 사회봉사와 함께 권고한다. 부모는 학생을 졸업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가기 때문에 큰 마찰 없이 병원으로 연계시킬 수 있다.
‘선’ 넘는 아이들의 기준
기질적 반항인지 아닌지는 상담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 그 기준을 살펴보자. 우선 초등학교 고학년, 즉 13세 이전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지각을 하거나 학교를 빼먹는 날도 빈번해진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거나, 자주 외박을 한다. 부모의 전화를 의도적으로 받지 않고, 귀가시간을 통제하는 부모와 마찰이 심해진다. 단순히 짜증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부모에게 욕설을 하거나 심한 경우 몸싸움까지 한다. 자해를 하는 등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시작한 나이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단지각·무단조퇴·무단결석이 잦았고, 가출이 있었다면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기준은 음주·거짓말·절도·폭력·성행위·규칙위반 등 공격적 성향의 비행을 반복하는 것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고, 신체적 공격을 자주 하며, 금품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른에게 욕설을 하고, 반항적이며, 적대적이다. 특히 자기보다 작고 약한 사람에게 더욱 난폭하다.
마지막 기준은 충동적·습관적으로 나타내는 분노감정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을 때, 타인이 자신에게 뭔가 잘못했을 때 화를 참을 수 없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흔히 다혈질이라고 부르는 성격과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다혈질은 빨리빨리 하고 싶어서, 성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하지만 그 흥분을 자신 혹은 주변 사람의 제지로 가라앉힐 수 있다. 하지만 ‘선’ 넘는 아이들은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를 내며,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상대방에게 거친 말·폭력을 쓰기도 한다. 통제가 가능하냐,가능하지 않느냐가 핵심이다.
‘마음 둘 곳 없어’ 방황하는 아이들
우울성 반항은 정서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마음속에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문제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형태인 셈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우울증을 함께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상담과정에서 나타난 부모와의 관계, 환경적 상황, 어린 시절 트라우마 등을 통해 현재 아이의 행동이 이해되곤 한다. 이 아이들은 비록 문제행동을 일으키고 있지만, 인격적 문제까지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울성 반항은 교육적 훈화와 상담으로 좋아질 수 있다(물론 우울 정도에 따라 병원으로 연계해야 할 때도 있다).
상담과정에서 살펴보면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부모와 골이 깊어지고 사이가 나빠지면서 중학교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너무 합리적이고 냉정하거나, 엄격하고 무서운 경우, 부모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되지 않게 대하는 경우, 부모가 자주 싸우거나 아이에게 분풀이하는 경우 등 집과 가정에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멀어지게 된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을 즐긴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슬프지 않으니까, 그 순간만큼이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으니까.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생기는 아이들이다. 손 내밀어 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어른’이 있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살펴보자.
이탈된 경로를 다시 바로 잡는 방법
경로를 이탈하면 내비게이션이 ‘띵띵띵’하면서 새로운 경로를 찾아준다. 조금 돌아가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방황도 마찬가지다. ‘망한 것’이 아니라 ‘헤매고 있을 뿐’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경험이 오히려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다. 아직 기회는 있다.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다시 길을 찾으면 된다.
● 지도방법❶ _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상담뿐만 아니라 아이와의 대화 첫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이해와 인정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 야단치기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이렇게 까지 되었는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상황이 이해된다고 행동까지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칫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정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 앞에서 부모는 폭력적인 행동을 선택했고, 부모의 잘못된 양육태도에 아이는 문제행동을 선택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상황과 행동을 따로 분리시켜 아이에게 전달하고, 문제행동 역시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었음을 알려줘야 한다.
“애쓰며 사느라 고생했네.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어찌 버텼을까? 살기 위해 선택한 너의 방법이었구나.”
행동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해주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 위로받은 마음은 빗장을 푸는 훌륭한 열쇠가 된다.
● 지도방법❷ _ 부모를 이해하라고 하지 말자
아이들이 쏟아내는 주된 이야기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서운함·분노감 등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부모님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먹고사느라 바빴을 것이고, 아이의 버릇을 고쳐야 했을 것이고, 아이가 말을 안 들었을 것이고, 오늘따라 언짢은 일이 많아서 감정주체가 안 되었을 것이고…. 수십, 수백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부모의 잘못된 행동까지 이해해야 할까? 개인적인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라고 모든 행동을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이해하는 순간, 너도 그렇게 행동할지도 몰라. 잘못하면 때려도 되고, 기분 나쁘면 욕해도 되고, 그래도 되는 거잖아.”
나를 힘들게 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마음의 짐을 덜게 해준다. 부모를 미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쁜 아이’로 인식하며,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신 부모님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려주는 것은 필요하다. 먹고 사느라 바쁘셔서 널 돌볼 시간이 없으셨구나, 늦게 오고 거짓말하는 너의 버릇을 고치고 싶으셨나 보구나. 그래야 이후 부모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할 수 있다.
● 지도방법❸ _ 다른 결과를 가져올 다른 선택을 찾아보기
상황은 여전히 똑같더라도, 선택의 폭이 좁았던 ‘어렸을 때의 나’와 고등학생이 된 ‘지금의 나’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땐 어려서 네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많지 않았겠지. 아마 너의 선택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거야. 적어도 친구들과 즐거웠잖아. 지금은 어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도 부모님 핑계만 대며 너의 행동을 합리화한다면, 너는 앞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 어때? 지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서둘러 진로상담을 계획한다. 늦지 않았다. 설령 늦었어도 괜찮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성장된 모습일 테니.
“늦었지. 하지만 지금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간이야. 어때? 한번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