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의 응급처치

2023.01.12 19:29:48

수업보다 안전

 

나는 퇴직 전 여러 해 동안 1학년 담임을 했다.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은 1학년 아이들은 '젊어지는 샘물'을 마시게 하는 순간들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가장 힘들고 마음을 졸였던 일은 안전사고 예방이었다. 무엇보다 오전 내내 화장실을 거의 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3월이 제일 힘들었다.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만큼 1학년 입학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문제였다. 학기 초에는 직원협의회가 잦았는데 그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직원회의로 1분만 자리를 비워도 어느 사이 피아노 위로 올라가 뛰는 아이, 친구와 싸우는 아이, 복도를 달리다 다치는 아이가 발생하는 게 1학년 아이들의 특징이었으니, 학과 공부는 그 다음이었다. 내 반 아이가 다치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이들끼리 놓아두는 일은 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학생 수가 15명이 넘으면 더욱 위험했다. 20명이 넘으면 초비상이 걸릴 정도로 예민했다. 그러니 20명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서 즐거운 생활을 공부하는 날은 목이 쉬곤 했다. 병아리들처럼 금방 뿔뿔이 흩어져서 뛰고 숨어버리는 3월에는 지쳐서 혼절하여 응급실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집에서는 한 아이도 힘들어하는 세상인데 혼자서 15명이 넘는 학급 아이들을 맡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은 존경스럽다. 요즘은 그래도 유치원은 보조 선생님이 따라 붙으니 좀 나을까. 나이가 더 어려서 돌볼 일이 더 많은 어린이집은 오죽 할까! 특히 요즘 아이들은 주의산만형 아이가 더 많은 듯하다. 저 혼자만 돌봐주는 환경에서 귀하게 자라다보니 사회성이나 인내심이 예전만 못한 것도 있으리라.

1980년대에는 매달 전교생이 학력평가를 실시했다. 그것도 공정하게 한다면서 담임을 교체하고 때로는 학생들도 다른 학년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게 했다. 이 때 저학년 교실에 들어가는 고학년 담임선생님들은 시험을 치르고 나면 기진맥진했다. 단 5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1, 2학년 학생들에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1학년 담임선생님에게 일이 생겨서 갑자기 학교를 못 나오는 날은 부득이 다른 선생님들이 1학년 임시 담임을 맡는다. 그 시절에는 1학년은 오전수업이므로 고학년보다 수업시수가 적어 4교시 후 수업이 없는 날도 있었다. 하루 6시간 수업하는 6학년 선생님은 1학년 수업 1시간이 4시간보다 더 힘들다고, 어떻게 1학년 담임을 하느냐고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때 1학년 학생 수는 대부분 40명에 가까웠으니, 5분 집중도 어려운 천방지축 아이들이 다치기만 안 해도 감사하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 부임했던 학교는 방과후학교로 학교 시설이 부족해서 교실을 활용하고 있었다. 내 반 교실은 오후 2시가 되면 피아노 교실이 되어 퇴근 전 까지 3시간 동안 전교생이 피아노 수업을 받느라 들락거렸다. 내 교실에 커다란 피아노가 6대가 있었다. 그 소음을 들으며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난청이 와서 병원을 다녀야 했다. 지금도 그때 발병한 난청으로 조용한 상태에서는 늘 귀에서 소리가 난다. 의사도 완치가 어렵다며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잠을 잘 때도 음악을 틀어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어찌 보면 직업병이 생긴 셈이다. 

내가 아픈 것보다 우리 반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호기심이 많고 늘 움직이고  놀기를 좋아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1학년의 발달 특징을 생각하지 못하고 음악실이나 강당 쪽에 피아노실을 만들 생각을 못한 탓이었다. 그것은 예산 문제일 수도 있고 충분한 협의 과정이 없이 결정된 시행착오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부잡한 아이는 꼭 있었다. 피아노가 옮겨질 때까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을 많이 겪어야 했으니 아이들 키보다 더 큰 피아노는 늘 사고 위험 요소였다. 모퉁이에 다치거나 올라가서 뛰지 못하도록 교실을 지켜야 했던 시간들. 가끔 피아노 소리를 피해 도서실로 가기도 했지만 업무 때문에 교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결국 피아노 소리에 오랜 시간 노출돼 심한 난청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결국 교장 선생님에게 건의했다. 피아노실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내 반을 비롯해서 다른 교실에서도 피아노 소음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오후 3시간씩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내 반과 옆 반, 유치원 교실, 위층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음이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던 전임 선생님들, 나 역시 1년 이상 그렇게 살다가 난청이 생기고 말았으니 누군가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산 문제가 걸려 있어 교육청 관리과 담당자가 파악을 위해 1학년 교실을 찾아왔다. 나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소음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따로 피아노 교실이 필요함을 충분히 설명했다. 결국 숙직실 옆방을 수리하여 피아노실로 만들게 되었다. 교육청에 요구하여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피아노실이 따로 나간 후 나도 아이들도 훨씬 안정적인 교실을 갖게 되었다. 그 때 만약 나서서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대로일지 모른다. 

또 한 번은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님이 학년말쯤에 갑자기 1층에 있는 1학년 교실을 2층으로 올리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사전에 충분히 직원협의를 거치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1학년만 1층에 있으니 2층에 있는 보육교실을 1학년으로 내리고 1학년을 올리면 전교생이 2층에 있게 된다는 논리였다.

1학년이 올라가면 전 학년이 쓰던 교실을 한 칸씩 옆으로 이동하며 전체 교실이 이사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교구나 자료가 모두 학년 수준에 맞게 들어가 있으니 다 옮겨야 할 판이었다.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라 학년말 사무로 바쁜데 갑자기 교실 집기들을 옮겨야 하는 일이 발생하자 다른 선생님들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아무도 반대를 못하는 데 또 다시 내가 나섰다. 교사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는 책임도 있으니 누군가 말을 해야 한다면 그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용기를 내서 1학년 교실을 옮기면 안 되는 이유를 직접 말씀드렸다. 첫째 이유는 1학년 아이들의 안전 문제였다. 2층에서 살면 1층 계단을 내려다보면서 언제 장난칠지 모르는 겁 없는 시기라는 점. 둘째 이유는 쉬는 시간이면 전교생이 2층 화장실을 함께 써야 하니 혼잡하다는 점. 특히 1학년 1학기는 학교생활 적응기라 수시로 용변을 보기도 하고 복도통행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뛰면 다른 반에 지장을 준다는 점.

무엇보다 계단 옆 교실을 이용해야 하는 2층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말씀드렸다. 퇴직 1년을 남겨둔 교장선생님은 무엇보다 안전사고에 민감했으므로 내 의견은 수렴되었다. 그리하여 전 학년 교실이 이사하는 대이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추운 겨울에 손을 불며 이사하느라 학습에도 지장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그 덕분에 우리 1학년 아이들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는 1층 교실에서 1층 화장실도 예전처럼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었다. 혹시 옷에 실수를 하는 일이 생겨도 보는 눈이 적으니 몰래 처리하기 쉬었다. 2층이었다면 선배들에게 들켜서 난감했을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학부모에게 연락하여 다른 아이들조차 모르게 뒤처리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씻겨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학교에 입학했지만 자신의 용변 처리를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아이는 옷에 실수를 하고도 말을 하지 않아서 애를 먹곤 했다. 부끄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때로는 남자 아이가 실수로 옷에 묻힌 채 교실에 있으면 고약한 냄새가 난다. 그러면 개인지도를 하는 것처럼 아이들 한 명 한 명 곁에 가서 냄새의 근원지를 찾는 탐정이 되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 몰래 먼저 찾는 게 중요하니, 찾아낸 다음에는 남자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뒤처리를 하기도 했다. 아무리 담임선생님이지만 여자이니 남자 아이를 씻기거나 옷을 벗겨 처리하는 데는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여학생은 내 몫이지만, 할머니뻘의 선생님이지만 조심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쪼르르 쫓아와서 묻곤 했다. "선생님, 00는 어디 갔어요? 00엄마가 왜 학교에 오셨어요? 00는 왜 집에 갔다 와요? 00는 밥 먹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안 보여요. 왜 옷이 바뀌었어요? "등등. 그때마다 거짓말을 그럴 듯하게, 아무렇지 않게 해주던 나도 매우 창의적인(?) 담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아이들은 알면서도 속아주었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은 선생님을 봐준 것은 아닐까.

교실에서 냄새가 난다며 친구들 엉덩이에 코를 대고 킁킁대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서로 아니라고 우기던 아이들. 정작 냄새의 당사자임에도 모른 척 아니라고 우기던 그 얼굴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어려도 자존심만은 끝까지 지키려는 안쓰러운 모습에 함께 변명해주던 내 모습도 이젠 그리운 풍경이 되었다. 벌써 중학생이 되었을 아이들이 보고 싶다!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으니!

안전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그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안전사고가 나면 아이에게도 학부모에게도 학교 측이나 선생님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아이들보다 항상 한 발 앞서는 준비와 예민한 감각이 중요하다. 6학년이라고 더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한 겨울 아침에 복도에서 뛰어오다가 넘어져서 다리에 깁스를 했던 아이는 가을 대운동회 때는 달리기 경주에서 넘어져서 또 깁스를 해서 아직도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때 너무 놀라서 장기기억에 깊이 저장된 탓이다. 지금은 40대 중반이 되었을 재주 많고 날렵하던 그 모습도 보고 싶다. 

10.29 참사가 불러온 국가적 안전사고로 국내외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안전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욕구라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른 모든 것을 가진들 생명을 위협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곳이 가정이건 학교건 어느 곳이든 안전만큼 귀한 가치는 없다. 

현직을 떠난 후 마음이 편해서 좋았다. 무엇보다 내 반 아이들의 안전문제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컸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심지어 방학 중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일은 안전문제였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아이의 이름. 30대 초반 그해 여름방학에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갔다가 목숨을 잃었던 아이는 교단에서 겪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픔이다. 황망했던 그날의 기억 속에 그 아인 아직도 웃는 얼굴로 각인된 채 기억 속에 살아있으니. 

여름방학 중에 일어난 사고라서 학교나 담임인 나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지키지 못한 아픔으로 도의적인 책임에 괴로웠다. 30여 년 넘은 시간이 흘렀건만 그 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니 이태원 참사로 자식과 지인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으리라. 

발령 받은 첫해 맡은 업무 중에는 양호 업무가 있었다. 12학급에 600명이 넘는 학생이 있는 시골 학교였지만 그 당시에는 보건교사가 없었다. 그러니 다치는 학생이 있으면 내 교실로 찾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내 반 수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학생 수가 많으니 자잘한 사고도 많아서 늘 긴장했다. 가장 잊히지 않는 사고는 지금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때는 실내화를 신는 일이 드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복도나 교실 바닥이 거칠어서 학생들이 발바닥을 다치곤 했다. 어느 겨울날이었는데 울부짖으며 내 교실로 뛰어온 학생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놀라서 보니 발바닥에 3cm 쯤 되는 나뭇결이 길게 박혀있었다. 손으로 뺄 수도 없고 핀셋으로도 꿈쩍하지 않았다.

시골학교라 병원은커녕 보건지소도 멀었던 그 시절, 나는 숙직실에서 소독용 물을 끓였다. 그리고 약간 뜨거울 정도로 찬물을 타서 아픈 아이의 발을 소독하고 깨끗이 씻겼다. 발을 불려 나무가시를 뺄 요량이었다. 손과 입을 사용하여 나무가시를 빼내던 순간 아이의 울음이 그쳤다. 상처 부위를 다시 소독하고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아주었다. 보건교육은 받은 적도 없는 엉터리 양호교사였지만 다친 아이는 내 반 아이들 수업보다 먼저였던 초보시절이었다.

보건일지를 쓰지 않고 지나는 날이 좋았다. 언제 내 교실로 달려올지 모르는 다친 아이들 때문에 마음 졸였던 날들. 나는 그 후로도 오랜 동안 보건담당 교사를 했다. 때로는 다친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보건소로 달리기도 했다. 보건교사가 배치되지 않았던 시절, 가는 학교마다 보건업무를 맡았던 덕분에 안전문제는 학습보다 우선순위였다. 체험학습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갈 때도, 체육시간에도 과도할 정도로 집착했다. 

이태원 참사를 접하며 잊힌 줄 알았던 아픈 순간들이 다시 재생되어 마음이 아팠다. 4학년 여름방학에 잃은 아이를 생각하며 명복을 빌었다. 그 아이를 잃고 얼마나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 가족들을 생각했다. 영원히 아픈 손가락으로 남은 그 아이는 아직도 해맑은 모습으로 4학년 때의 모습으로 사진처럼 저장된 아이의 명복을 빈다. 기뻤던 순간은 날아가도 뼈아픈 슬픔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황망한 죽음으로 세상을 등진 10.29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장옥순 작가, 전 초등교사 jos22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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