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여행] 추위에 맞설 가치가 있는 겨울의 철원

2022.12.12 14:16:55

 

겨울이 되면 여행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은 추운 날씨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끔은 겨울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혹독했던 추위를 경험한 장소를 떠올리기도 한다. 앞에 해당하는 곳이 남해안이나 제주도라면 뒤의 장소는 대체로 경기도나 강원도의 북쪽이 될 것이다. 여름에는 비슷한 날씨 때문에 큰 온도차를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겨울이 되면 두 지역의 차이는 극심해진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긴 지리적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다. 
 

추운 겨울 날씨의 절정을 느끼면서 뭔가 제주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강원도 철원이다. 철원은 내륙의 분지 지형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추운 동네로 손꼽히는 곳이다. 남한 기준으로 북쪽의 경계라는 점에서 겨울의 추위는 다른 곳과 비교하기 힘들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지역의 자연, 특히 한탄강 일대는 화산섬 제주도를 많이 닮았다. 이 지역에서는 근현대 역사와 한탄강의 화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분단과 전쟁, 평화를 이야기하는 곳 

 

실제 철원 현대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소는 바로 ‘노동당사’다. 북한의 노동당이 철원 일대에 둔 당사 건물로 지금은 폐허처럼 돼 있다. 이 건물을 볼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은 철원이 38선과 휴전선이 교차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며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는 과정에서 경계가 됐던 ‘북위 38도선’, 곧 38선을 기준으로 할 때 철원은 북쪽에 속했다. 그래서 1946년경, 소련군이 진주한 상황에서 북한의 필요에 따라 노동당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3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 잔해만 남아있지만,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았으며 정문 포치 부분은 러시아풍이 드러나 건축 당시의 거창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극심했던 한국전쟁 당시 전장이 되면서 많은 건물이 파괴됐으며, 휴전선 남쪽에 포함되면서 이전과 다른 역사를 맞이하게 됐다. 남한에 속하게 됐지만 휴전선 일대, 곧 접경지역에 속하며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됐고 옛 철원의 번영이 역사 속에 묻히는 과정에서 노동당사 건물 역시 그런 역사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지금도 분단, 전쟁, 평화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러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북한이 이렇게 큰 규모의 노동당사 건물을 지은 배경은 무엇일까. 노동당사는 철원뿐 아니라 인근의 김화, 평강 일대를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철원 외 다른 지역까지 통치하기 위해 크게 지었을까. 철원 일대에는 여러 금융, 산업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다. 광복 당시 철원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였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철원에는 1920년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니 이때 이 인구가 1만2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40년 즈음에는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춘천과 견줄 수 있는 규모였다. 
 

근대에 이르러 철원이 빠른 성장을 보인 배경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철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바로 1914년에 부설된 경원선이다. 경원선은 서울 용산과 강원도 원산을 잇는 223km에 이르는 철도다. 경원선은 우리나라 동서를 잇는 교통수단으로 경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원산이 가장 크게 변화를 이뤘지만 한편으로 경원선이 지나는 철원 역시 교통의 결절점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고을이 된 것이다.  
 

당시 수도권에서 강원도, 혹은 함경도 일대로 간다면 철원을 지나게 됐으니 여러모로 인상 깊은 공간이 됐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강원도 양양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조화벽 선생도 철원을 지났다. 당시 양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원선을 이용해 원산으로 간 뒤, 다시 배를 타고 양양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었다. 경원선을 타고 이동 중이던 조화벽 선생은 마침 기차가 철원역에 멈췄을 때 철원의 만세운동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철원이 빠른 시기에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원선을 통해 소식이 전해지고 사람이 옮겨갈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철원이 다시 한번, 교통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 1931년에 일어났다. 이 해에 금강산전기철도, 곧 금강산철도가 개통된 것이다. 금강산은 조선시대 명승지로 선비라면 일생에 한 번은 찾아야 하는 곳이었다. 이런 명성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였으니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했다. 이런 수요를 염두에 둬 당시 처음으로 전기를 이용한 철도를 금강산까지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철도이며 관광 목적의 철도였다. 이 금강산철도가 출발하는 곳이 바로 철원이었으니 철원역을 기점으로 삼아 내금강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116km에 이르는 철도였다.
 

금강산 관광을 하려는 사람은 용산에서 철원까지 경원선을 타고, 철원역에서 다시 금강산철도를 갈아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었다. 용산에서 철원까지 97km 정도였는데 약 2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는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됐으니 모두 6~7시간 정도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다만 기차 요금은 만만치 않아서 금강산철도의 경우 7원56전으로 당시 쌀 한 가마 가격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금강산철도 개통으로 금강산 수학여행 붐이 일기도 했다. 여기서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경우 철원에 머무르거나 오고 가는 길에 철원 일대를 둘러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으니 수도권 사람들에게 낯선 도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철원의 역사와 교통과 관련된 시설은 모두 유적으로만 남게 됐다. 금강산철도와 관련해서는 철원군 김화읍의 금강산철도가 지나던 ‘금강산 전기 철도 교량’이 남아있으며 옛 철원역은 철원읍에 역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과 선로 일부만 남아있어서 한때 역무원 80명이 근무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 철원역을 다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노동당사 앞 공간에 생긴 ‘철원 역사문화공원’이다. 일제강점기 철원의 여러 시설을 상징적으로 재현해 놓은 조그마한 장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인데 그 중심에 옛 철원역을 복원해 놓았다. 위치며 규모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철원역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관광용 모노레일의 출발 장소로도 쓰고 있다. 

 

제주도 풍광과 꼭 닮은 용암대지 

 

모노레일은 철원역을 출발해 인근에 있는 높이 362m의 소이산 정상 근처까지 다녀올 수 있다. 정상에 올라가면 철원 발전의 또 다른 배경, 넓디넓은 철원 평야를 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에 이런 평야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배경이 바로 용암이 만든 대지, 곧 용암대지라는 점은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일대는 약 50만 년 전부터 12만년 전 사이에 평강의 오리산 일대에서 분출한 용암이 만든 대지다. 지층 조사에 따르면 지역에 따라 5번에서 11번 정도 용암이 분출되며 이런 모습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지질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원래 있던 비교적 높은 산은 용암이 모두 덮지 못해 낮은 언덕으로 남았으니 백마고지며 아이스크림고지와 같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가 됐던 곳이다. 용암이 덮인 대지는 강의 침식 현상이 다른 지역보다 크다. 뜨거운 현무암이 식으면서 나타나는 5각형, 혹은 6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무늬가 드러나는 주상절리 현상과 관련이 있다. 보통의 우리나라 지층이 완만한 사선을 그리며 침식되는 것과 달리 수직의 절벽이 발달한 이유다. 이렇게 수직 절벽, 곧 협곡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한탄강이다.
 

 

한탄강에서 주상절리를 볼 수 있는 곳은 27km 정도로 최근 절벽 옆에 길을 내 잔도 형식으로 감상하며 걸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길이 3.6km의 ‘한탄강 주상절리길’이다. 순담매표소와  드르니매표소를 잇는 길로 걸어 편도로 이동할 경우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절벽 옆을 걷는 것도 아찔한데 길 상당 부분이 아래를 볼 수 있는 방식이라 약간 공포심을 느끼기도 한다. 주변 풍광은 영락없는 제주도 모습이다. 천지연 폭포며 쇠소깍 일대의 현무암으로 만든 절벽과 같은 모습이 내내 이어지는 것이다. 
 

한탄강의 풍경을 조금 더 즐기는 방법은 ‘한탄강 물윗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강 위에 부교 형식으로 만든 길로 출발부터 도착까지 약 8km 정도다. 강 위를 걷는 길이라서 한탄강이 완전히 어는 12월 중순에 전체 코스가 개방된다. 꽁꽁 언 협곡을 탐사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처럼 철원역, 철원 평야, 그리고 한탄강이 묘하게 이어지는 철원은 역사 유적과 함께 조금은 낯선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철원 여행은 매서운 추위에 맞서 한 번쯤 다녀올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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