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길이는 시간에 비례
어머니의 눈물
어느 왕국에 아름다운 여인이 살았다. 사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노모와 함께 사는 한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작은 푸줏간을 했다.
여인을 향한 연정은 그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종일 굴러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여인과 마주친 사내는 감춰온 마음을 내보였다. “내 마음을,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어요. 다들 진귀한 보물과 희귀한 동물을 가져왔지만 내 마음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흠, 정말 특별한 것을 보면 내가 흔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특별한 것이라면…….” “혹시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의 심장을 가져올 수 있나요?”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제 어머니인걸요…….” “당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다른 남자들의 구애를 물리치고 당신의 청혼을 수락할게요.”
사랑에 눈이 먼 사내는 그날 밤 짐승으로 돌변했다. 어머니가 잠든 사이 심장을 파냈다. 동이 트자마자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여인을 만나러 뛰어가던 그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심장에서 울음기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어디 다쳤느냐? 천천히 가거라, 천천히….” 188~189쪽
<달팽이의 별>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달팽이처럼 촉각에만 의지해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사는 남편과 척추 장애를 앓는 아내의 사랑 이야기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가장 귀한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습니다. 가장 값진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습니다.“ -72쪽
사랑의 대상 중에서 가장 먼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지난 며칠 동안 왼쪽 눈에 다래끼 증상이 와서 불편하고 아팠다.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랬으리라. 며칠 동안 눈 밑을 가볍게 자극해주고 몇 개 남지 않은 아래쪽 속눈썹을 수시로 건드려주었다. 이틀 동안 관심을 갖고 걱정하며 만져주었더니 다행히 가라앉아 가는 중이다.
온통 벌게진 왼쪽 눈이 하마터면 커다란 다래끼로 고생할 뻔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내게 와서 눈이 아프다고 할 때마다, 눈에 뭐가 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그렇게 처방해줘서 낫곤 했다. 내 눈마저도 시간을 내주고 사랑해주어야 아프지 않다는 것을! 이 방법은 어렸을 적에 어머니께 배운 방법이다. 그 덕분에 다래끼로 고생한 적이 없었고 제자들에게도 전수해주었다.
이 책 덕분에 아침을 씩씩하게 시작했다. 좋은 책이 주는 감동은 이렇듯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단 한 문장이 주는 울림통이 이렇듯 크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사는 까닭에 부르는 곳도 오라는 곳도 없는 일상이다. 자칫 무기력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책 덕분에 봄기운을 먼저 만나는 중이다.
나의 손길이 필요한 가족에게 나는 산타 할아버지가 분명하니 즐거운 일이다. 나만 바라보고 사는 생명들에게 나는 책임이 있으니. 날마다 올리는 나의 졸필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으니 힘을 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상공간에 연서를 쓴다. 혹시 춥거나 허전한 누군가의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의 불씨였으면 좋겠다.
작가 이기주의 책은 여백이 많아서 좋다. 생각할 공간을 준다. 작가의 생각을 욱여넣지 않아서 좋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대목은 산타클로스였다. 마치 나에게 말하는 듯 다가와서 마음에 박혔다.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산타클로스 -163쪽
이제 내가 할 일은 마지막 문장이라는 걸 가르쳐주었다.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것! 누군가에게, 세상에게, 가족과 지인들에게 뭐든 주는 삶만 남은 거라고. 일깨워 주었다. 천수답처럼 내 손길만 기다리는 베란다의 화분 속의 생명도, 작은 고양이 한 마리도, 내 손길을 좋아하는 외손녀를 사랑하는 일도 내 시간을 내주어야 하는 사랑이다.
부족한 물을 재활용하며 아끼는 작은 일에도 정성이 필요하다. 세탁기에서 마지막 헹굼으로 버려지는 물을 받아 화장실 변기용 물로 재활용하는 일에도 수고가 필요하다. 쌀을 씻은 물, 채소를 씻은 물도 받아서 재활용 하는 중이다. 물 한 방울이 내게 오기까지 거친 그 오랜 여정은 나의 머리로는 계산조차 불가능하다. 물 부족이 아니더라도 아끼고 깨끗하게 쓰는 일은 당연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다. 내가 들인 시간의 길이와 수고의 양만큼 세상도 좋아지리라
누군가에게, 세상의 무엇인가에 산타클로스가 되는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워진다.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독서를 이기는 건 없다"고 한 워런 버핏의 말은 진리에 가깝다. 무료한 내 일상을 깨워준 것도 이 책이 던져준 선물 같은 한 문장이었으니! 나는 지금 작가들이 남긴 언어의 꽃향기를 같이 나누는 배달부로 새벽을 연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의 산타클로스가 많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