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 고향 김천 황악산(黃嶽山)에는 직지사(直指川)가 있다. 418년 신라 눌지왕 2년 아도(阿道)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김천 시내로 흐르는 직지천, 여기서 바라보는 해발 1,111m의 황악산은 너그럽고 후덕하다. 산이 거느린 자락이 넓고 넉넉하다. 그 넉넉한 자락이 직지사를 품고 있다.
명산에 대찰 명소이었으므로 학창시절 직지사는 단골 소풍 장소이었다. “이번 소풍은 직지사로 간다!” 선생님이 발표하면 우리는 실망의 억양을 가득 실어서 “아휴! 또 직지사!” 하며 단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물이든 자연이든 제 고향에서는 알아줌을 얻기 어렵다고 했던가. 늘 가까이 있으면, 대단한 것도 만만해지고 범상해진다. 만만해진다는 것은 내 안에 자만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위험이 끼어든다. 나도 목을 빼고 먼 바깥만 향하며, 내 주변의 가까운 것을 만만히 여기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특별한 반성을 했다기보다는 시간의 섭리에 따라 그리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란 위대하다. 어떤 완강한 것도 누그러뜨린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나이 듦이 감사하다. 경솔하여 만만했던 것들을 소중한 것으로 다시 보이게 한다. 나이 듦에 대한 감사는 꼭 은퇴 무렵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2·30대는 그때대로, 40대는 또 그때대로 각기 고유한 ‘나이 듦의 감사’가 찾아오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전에 가까이 있어 만만하고 상투적으로 보이던 것이, 어느 사이에 원대한 이데아처럼 승천하여, 하늘에 걸릴 수도 있음을 내 안에서 경험한다. 직지사도 그렇다.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고향의 황악산과 직지사는 서정주 시인의 구절을 빌려서야 비로소 내 앞에 바로 선다. 아니 내가 그들 앞에 바로 선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이 익숙한 시어를 고향의 황악산과 직지사로 불러오면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황악산과 직지사를 나는 본다. 그 산과 그 절이 누님처럼 돌아왔다기보다는, 그 산과 그 절을 무연(憮然)히 여기며 떠났던 내가 인제는 돌아와 그 앞에 새롭게 선다. 이렇게 말함이 맞다. 그래서 나는 ‘황악산’과 ‘직지사’라는 기호(記號)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다. 내 인생이 터득한 의미와 정서를 담아서, 이 산과 절을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서 나이 듦이란 하늘이 베푸는 은혜의 일종임을 깨닫는다.
요즘 고향 갈 때면, 나는 틈을 만들어 직지사에 들른다. 시간이 있으면, 왕복 두 시간 운수암까지 다녀오고, 자투리 시간일 때는 그저 대웅전 마당에 잠시 머물다가 오기도 한다. 그 발길에 ‘소풍의 추억’이 따라오고, 절 입구 식당에 들면 옛정으로 어울렸던 옛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때 소리 높여 기원을 담았던 그 건배사들은 어떤 윤회의 길을 가고 있을까.
카페의 넓은 창으로 황악산 능선과 산마루를 대하면, 마음에 고이는 위안이 깊고 담백하다. 이곳으로 왔던 수많은 소풍을 연대기처럼 가지런히 머릿속에서 챙겨보는 일은 얼마나 마음을 유정하게 이끄는지, 그것으로도 작은 수행(修行)에 드는 듯하다. 그런데 그때, 그 선생님들은 지금은 아니 계시는구나. 그걸 대웅전 마당에서 문득 깨닫는다.
02 올해 연초에 외우(畏友) 우한용 교수가 탁상달력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우편물 부치러 자주 가는 동네 우체국에서 구한 달력이라 했다. 달력의 그림이 소박하고도 예뻤다. 우 교수는 내게도 줄 요량으로, 구하는 김에 한 부를 더 구했다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우체국 친화의 정서’가 있다. 둘이 국내외를 여행하는 동안 낯선 타관 도시의 우체국을 찾아서 함께 편지를 쓰고 부치던 일들이 많았다.
우 교수는 우리의 이런 기억을 소중하게 떠올리며 우체국 달력을 내 선물로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올 한 해는 이 우체국 달력을 서로 간의 신표(信標)로 삼고 지내자는 뜻으로도 여겨졌다. 나는 우 교수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박 교수, 올해는 정든 사람들에게 편지 많이 쓰게나. 더러는 내게도 좀 쓰고….” 실제로 우리는 SNS로 소통하는 것이 대세가 되기 전까지는,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던 시절이 한참 있었다. 제법 긴 서간으로 서로의 사유와 정서를 문답처럼 나누기도 했었다. 지금도 내 서랍에는 우 교수에게서 받은, 짙은 청색 만년필로 쓴 편지 수십 통이 쌓여 있다.
달력의 그림들이 한결같이 예뻤다. 열두 분의 화가들이 열두 달마다 예쁜 우체국 그림을 채색화로 그려 넣은 달력이었다. 달력에는 전국 방방곡곡 동네 우체국들이 호젓하고 화평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강원도 삼척 정리우체국도 있고, 경남 산청군 생초우체국도, 전남 홍도우체국도 있었다. 서울에 있는 구로1동 우체국도 들어 있었다. 4월 삼척 정리우체국은 문 앞에 늘어선 벚꽃나무가 등불처럼 환했다. 5월 산청 생초우체국은 활엽수 신록에 둘러싸여 싱그럽고 입구 화단에는 꽃들이 봄을 피우고 있다.
내게는 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저 우체국 창가에서 누구에겐가 엽서 한 장을 쓰고 싶었다. 여기서 자랐던 사람들은 이 달력을 보면, 그런 마음이 더 하겠지. 객지로 나가 나이를 먹고 인생을 겪어내는 사이, 고향 공간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리라. 그렇게 변전하여 원숙해 가는 인생이니 말이다. 나는 문득 혹시 이 달력에 직지사 우체국 그림은 없을까 하여, 정월에서 12월까지 달력을 넘겨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직지사 우체국은 없었다. 살짝 아쉬웠다.
달력 속 우체국 건물들은 조촐하면서도 단아하다. 저 지붕 아래 저 문 안으로, 수많은 사연이 떠나고 도착하여, 보내고 받는 마음과 주고받는 까닭들이 조용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우체국은 넉넉하게 이타적(利他的)이고 위대해 보였다. 그런 기품이 우체국 달력 그림에도 잘 드러나 있는 듯했다. 나는 우 교수가 준 이 탁상달력을 내 서재 책상 컴퓨터 옆에 두고, 올 한 해의 시간을 사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체국과 친해지기로 생각하였다.
03 봄날, 다시 직지사에 왔다. 만세교(萬世橋) 건너고 일주문(一柱門) 지나고, 대웅전 거쳐, 천불전(千佛殿) 마당에서 황악(黃嶽)의 이마를 본다. 황사 먼지 낀 날이지만 부드러운 연두의 봄기운이 산록에 퍼져나간다. 절 뒤편으로 올라가서 계곡에 잠시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 물소리에 몰입하면, 내가 물소리를 듣는지, 물소리가 나를 듣는지 모르는 데에 이른다. 그런 시간을 누리고 다시 직지사 입구로 돌아온다. 좁은 개울을 건너니 직지사 우체국이 보인다. 반갑다.
우체국에서 엽서 몇 장을 사서 우체국 창가에 앉는다. 내가 배우는 학생으로 다녔던, 내 일생의 학교들을 호명해 본다. 경산 다문초등학교, 문경 갈평 용흥초등학교, 김천 아포초등학교, 김천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그리고 육군보병학교, 그때 그 학교에서 나를 가르치고 훈육하며, 나를 ‘사람’으로 길러내었던 나의 스승들을 떠올려 본다. 학교가 아무리 근대 생산 시스템의 일부로 수단화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나를 ‘사람’으로 길러 준 곳의 첫 자리에 학교와 스승이 있었다.
나는 다시 내가 선생으로 다가갔던 학교들을 호명해 본다. 연서중학교, 장충여자중학교, 관악고등학교, 청주교육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그리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학생들과 인연 쌓으며 출강했던 서울대, 동국대, 한양대, 이화여대, 그때 그 학교에서 나를 선생 되게 했던 제자들, 선생의 열정을 품게 했던 제자들을 떠올려 본다. 선생이 있고 제자가 있다는 말도 맞지만, 그 말이 맞기 위해서는 ‘제자가 있고 선생이 있다’라는 말도 나란히 있어야 한다.
어디로, 누구에게로 엽서를 쓸까. 그러나 막상 이 오월에 편지를 올려야 할 나의 스승들은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안타깝다. 나는 마침 수첩에 주소가 있는 박난경에게 엽서를 쓴다. 1975년 장충여중 제자이다. 졸업 이후 아직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간간 편지로 열심히 사는 생활인의 안부를 전해오는 제자이다. 엽서를 쓰는 동안, 평일 오전 직지사 우체국은 적막이 깃든다. 그 적막에 내 육필 글씨들이 조용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월이다. 곧 스승의 날이 돌아온다. 그 옛날의 제자들 이름을 조용히 적어 본다. 직지사 우체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