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점심 모임이 끝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매우 두꺼운 신간으로 나온 <말씀 등불 밝히고>를 찾았다. 저자(김기석)가 신학자이자 목사이고, 목회 현장의 설교를 책으로 낸 것이어서, 나는 당연히 이 책을 ‘종교’코너로 가서 찾았다. 그러나 책은 그곳에 없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책이 있는 곳을 검색하여 알려 준다. 책이 있는 곳은 ‘인문학’코너였다.
나는 이 책을 소개하는 북 토크(Book Talk) 영상을 이미 보아 두었다. 저자가 목사이면서 문학평론가였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는 서점이 이 책을 인문학 서적으로 분류하여 배치해 놓은 데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신학자인 저자는 성서를 다양한 인문학 코드(특히 문학적 코드)로 불러와서 해석의 정교함과 수월성을 보여 주었다. 많은 인문 고전이 성서로 와서 성서 해석의 풍성함을 도움으로써, 성서를 통한 실천적 지향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서점을 나오려다가 작년 여름에 내가 편저한 책 <한글의 최전선, 지구촌 한글학교 스토리>가 궁금했다. 이 책은 지구촌 각지에서 디아스포라 코리안으로 살아가는 750만 재외동포들이 각기 거주지역 커뮤니티에서 주말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에게 한글과 한국어 그리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한글학교 이야기를 담았다.
한글학교 설립과 운영의 애환, 그 좌절과 보람의 역정을 한글학교 교육자들의 체험 내러티브로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이국땅에서 살아가며 민족정체성을 이어가려는 한글학교 교육자들의 표정과 마음이 잘 담긴 책이다.
책을 내어 본 분들은 아시리라. 서점에서 내 책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다시 서점 직원에게 가서 내 책이 있는 곳을 검색해 달라고 해서, 해당 서가로 갔다.
아! 그곳은 좀 엉뚱한 자리였다. 그 책은 ‘국어사전 코너’에 있었다. 아마도 분류 담당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이 책의 제목에 ‘한글’이란 말이 들어가 있으니, 그리고 ‘한글학교’란 말도 들어 있으니, 게다가 책의 두께도 상당하니, 한글사전의 일종으로 보았음직하다.
저자인 내 생각으로는 이 책이 학교에 관한 책이니 ‘교육코너’에 있거나, 생생한 증언의 이야기들로 되어 있으니, ‘산문·수필코너’에 있는 것이 적합하다. 좀 낯선 발상으로 인문학의 여유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라고 해서 ‘인문학코너’에 있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분류란 근대 학문과학의 체계를 도우며 진화한 근대의 이성적 산물이기도 하다. 분류란 전체의 체계를 반듯하게 해 주지만, 분류된 개체(분류의 대상이 된 개별 텍스트)는 그 분류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고, 분류의 벽 안에 갇히기도 한다. 내 책은 이상한 곳에서 감금되어 있었다. 분류가 완강하면, 지식도 활성의 동력을 얻지 못하고 경직된다. 인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천체물리학자이며, 외계생물학의 권위자인 칼 에드워드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의 명저 <코스모스>를 읽었다. 과학자인 그가 지닌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에 나는 탄복한다. 천체물리학에는 완전 문외한인 내가 이 책에 상당한 지적 흥미를 유지하며 읽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인 세이건이 구사하는 뛰어난 ‘인문학적 코드’ 때문이었다. 매력적이었다.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이야기에는 세이건이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역사·문화·풍속·지리 등을 매우 심도 있게 섭렵하였음을 알게 한다. 이는 모두 인문학의 콘텐츠이고 인문학의 지경(地境)에 속한 것이다. 그는 고대 학문의 자리에서 과학을 설명하고, 과학의 심층(deep structure)을 추리하며 간파해 낸다.
세이건의 인문학 내공은 인문학자 못지않다. 내게 경이로운 것은 과학을 설명하고 추리하는 데에 인문학이 저렇듯 생산적 융합을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교육영역이 관심을 쏟아야 할 대목으로 나는 여겨졌다.
세이건이 저술을 통해서 남긴 어록도 인문적 초점을 향하는 것이 많다. 그것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융합적 탐구정신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그의 어록이 그러하다.
‘과학은 영성(靈性)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영성의 심오한 원천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영성을 논하면서 어떤 고정관념을 견지한다. 영성이란 과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어떤 초월적 의식 내지는 신비의 차원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는 과학과 영성의 상관성을 피력한다. 인문학자나 신학자가 할 법한 말을 하는 것이다. 다음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과학자로서 인문 소양의 끝판왕처럼 보이던 학자가 있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현대의 다윈으로 평가받고, 최고의 진화 과학자로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2021)이 바로 그다. 윌슨 교수는 생물다양성(biodiversity), 생명사랑(biophilia) 개념을 만들어 내고, 지구생명 보전운동을 펼친 생태주의자였다.
나는 그가 쓴 <통섭(統攝/Consilience)>을 읽으며, 형용할 수 없는 경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인문학의 주제들을 불러 모아서 그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즉 통섭의 관점으로 인문학의 주제들을 재발견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전문가 수준으로 다가간 인문학의 영역은 다채롭다. 역사·문학·신학·철학·예술·종교·풍속·경제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 영역을 망라하는 수준이다. 나는 윌슨의 이 과학서적을 인문학 탐구로 간주하고 읽어도 큰 무리는 없겠다고 생각해 본다. 물론 인문학 텍스트는 아니지만, 인문학 이해의 한 맥락에 가담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정통 인문학자이면서 과학기술 지식을 해박하게 구사하는 저술가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를 빼놓을 수 없다. 하라리는 히브리대학의 역사학자로서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의 저자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근년에 읽은 그의 저술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은 그의 인문학이 얼마나 과학·기술의 지식을 향하여 유연하게 확장된 경지를 보여 주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하라리는 인문학의 역사적 상상력으로, 과학과 기술이 지배할 미래 인류에 대해서 현실성 있고 합리적인 예언을 한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 예컨대 환멸·일·자유·평등·종교·문명·이민·테러리즘·전쟁·세속주의·무지·교육·명상 등은 미래 과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메타 인지(meta cognition)하지 않으면 제대로 서술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인문학의 현실적 효용을 높이는 시도로도 평가하고 싶다. 그의 이런 융합적 담론이 ‘불확실하고 복잡한 세계에 위기를 극복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평을 듣기 때문이다.
인문소양을 바탕으로 교육학을 전공한 나는 이들 책을 읽으면서, 학문과 지식(또는 앎의 생태)에 대한 나의 인식론을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이후 나의 전공인 국어교육의 내용 범주와 교육방법에 관한 생각을 좀 새롭게 다듬을 수 있었다.
윌슨의 경우, 그가 모든 지식을 과학적 환원주의로 설명한다는 비판을 듣기는 했지만, 자신의 학문적 논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윌슨이 수용하고 통찰하는 인문학의 주제들은 참으로 다양하고 일정한 심도를 갖춘 것이었다.
인문학을 학문 범주로만 규정하면 전통 인문학도 분류의 경직성에 갇혀 버릴 수 있다. 물론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문(文)·사(史)·철(哲)의 범주 전통을 분명히 함으로써, 분류가 담보하는 학문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라는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을 감당하는 교육의 영역에서는 인문학이 좀 더 유연하고, 좀 더 확장된 모드(mode)로 다가왔으면 좋겠다. 이를 ‘인문학의 교육적 진화’라 하면 어떨까. 원래의 전통 학문체제에 속했던 인문학은 삶의 현장이나 교육 역동적 작용으로 와서 호응하려는 역할이 미흡했다.
이는 학교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 등의 교과를 더 잘 가르치라는 말이 아니다. 인문학이 인문학 아닌 것과 좀 더 친하게 상관을 맺고 ‘교육 일반’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확장된 인문학’이라 부르고 싶다.
‘확장된 인문학’은 학생들의 발달에도 유익할 뿐 아니라, 선생님들에게도 교육역량을 높이는 데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인문학의 대립항(對立項)을 굳이 자연과학으로 고착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