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과 교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길

2024.06.04 10:00:00

 

한국 사회는 ‘교권’을 어떠한 방향으로 보장하고 회복해야 할 것인지 커다란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후 모습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각자 가리키고 있는 ‘교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교권’은 교사의 인권, 교사의 직무권한, 교사의 권위 등이 켜켜로 혼재된 개념이다. 요컨대 학생인권과의 관계에서 교권을 논의하고자 한다면, 앞에서 열거한 교권 중 어떤 측면을 강조할 것인지를 명료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교권의 모든 측면이 학생과의 관계에서 형성되거나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는 교사이기 이전에 자연인이며, 자연인들의 집단에 속하는 존재가 된다. 동시에 국가는 「헌법」상 모든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학교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로서의 교육에 참여하게 한다. 그러니까 학교는 국민으로부터 학생을 교육할 권한을 위임받고, 교사는 이를 다시 위임받아 직무를 수행한다. 학교조직이 여타의 조직과 구별되는 핵심기술인 교수-학습, 즉 수업을 비롯하여 교사가 학생과의 관계에서 교육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권위가 확보되어야 한다. ‘교권’은 복합적인 개념이지만, 특히 학생과의 관계에서 이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후자에 가까울수록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지난 4월에는 충청남도의회와 서울특별시의회가 잇달아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가결했다. 직후 경기도교육청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부칙으로 포함하는 새 조례안 제정을 예고하였다. 가결된 ‘충청남도 학생인권조례 폐지 조례안’의 제안 이유를 보면, 동 조례로 인해 ‘학생들의 책임과 의무, 교사의 권리는 없고 오직 학생의 인권만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학생인권과 교권의 불균형이 심화되었으니, 동 조례의 폐지로 학생인권과 교권이 상호 조화로운 학교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 전반에서 밝히고자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처럼 권위(authority)란 그 속성상 법규범의 차원에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서, 적어도 조례는 그 수단이 분명히 아니라는 점을 짚고 싶다.

 

설령 백번 양보하여 법규범으로 학생에게 책임이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교권이 두텁게 확보될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조례로써 주민의 권리 제한이나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려면 반드시 법률의 위임을 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조례로 이와 같은 규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법령으로 규율하고 있는 사항이므로 조례의 성격은 이를 확인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독으로 학생에게 새로운 책임이나 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례가 아니라 규범력을 가진 다른 수단이 강구되기만 한다면 교사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의 노스다코타 대학교 교수인 다이애나 폴레비치(Diana D'Amico Pawlewicz)가 ‘교사의 권리(teachers' rights) vs 학생의 권리(students' rights)’라고 묘사했던 1960년대 미국의 공립학교 상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s)과 함께 인종에 따른 차별을 배제하고 법 앞의 평등원칙을 구현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뉴욕시에서도 여러 풀뿌리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은 학교를 비롯한 공공영역에 대하여 지역사회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지역사회 활동가들은 뉴욕시 공립학교 교사가 흑인과 히스패닉 아동에 대한 양질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방해한다고 주장하였다. 소수계 학생들을 가르칠 소수계 교사를 채용하지 않은 채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인종차별적 권력구조(a racist Power Structure)’가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의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뉴욕시 교사 다수와 교사노조(United Federation of Teachers, 이하 ‘UFT’) 지도부는 인종분리 철폐를 열렬히 지지하고, 민권운동을 통해 제기하는 인종에 따른 불공정을 시급한 사회문제로 인식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기존 사회질서가 크게 변화하고 구조적인 변화 압력이 높아지면서, 노조와 교사들은 민권운동의 요구가 자신들의 직업적 권리나 특권과 충돌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교사노조(UFT)는 학교가 교사들이 전문가로서 교육활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거칠고 위험한 공간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967년 단체협약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이른바 ‘문제아(disruptive child)’ 조항을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내용은 ‘아동이 정규교실에서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 정규수업상황에서 아동을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학부모 주도의 풀뿌리 단체와 함께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사협회 회장인 알버트 반(Albert Vann)은 ‘문제아’ 조항(UFT가 주장한)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등 흑인아동에 대하여 백인교사들이 잘못된 교육과 박해를 영속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난한다. 이에 학부모들은 교사노조와 교육위원회에 대하여 인종차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피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포드재단이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교사노조(UFT)와 교육위원회는 일부 시범 학구에서의 지역사회 통제 실험을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교사노조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소수계 학생들을 가르칠 소수계 교사를 채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션 힐-브라운스빌(Ocean Hill-Brownsville) 커뮤니티 이사회가 교사노조 소속인 19명의 백인인 관리자·교사의 고용 종료를 결정한 것이다. 결국 1968년 교사들의 ‘오션 힐-브라운스빌 파업’으로 이어졌다. 뉴욕시 공립학교는 1,900여 일간 문을 닫았으며, 백만 명 이상의 학생들은 집에 머물게 되는 극단적인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다.


폴레비치가 대비시킨 ‘teachers' rights vs students' rights’는 말 그대로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인종 등 개인의 배경과 무관하게 최소한 공립인 학교에서만큼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교사노조(UFT)가 1967년 민권운동에 관한 입장을 선회하기까지, 미국에서는 사회적·인종적·문화적 변화로 인해 더욱 복잡한 교실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교육자들은 더 이상 더 이상 ‘in loco parentis(부모를 대신하여)’라는 전통적인 교리에 의존할 수 없다고 보았고, 교육자의 징계나 규율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3 필요한 경우 학생을 학교로부터 배제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도록 하는 ‘문제아 조항’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학부모 등 지역사회가 이러한 배제적 규율 방식으로부터 소수계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교원에 대한 통제수단을 확보해달라고 더욱 강하게 요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학부모와 지역사회 활동은 교사노조와 같은 입장에서 민권운동을 바라보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문제가 촉발된 것은 인권의 관점에서 국가에 대한 작위행위 요구가 규범적 급부만으로 작동했고, 사실적 급부에 대한 응답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기존의 백인교사들을 해고하고 소수계 교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방식, 그리고 교사들은 복잡한 교실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더욱 강력한 규율을 요구하는 방식은 가장 저렴하게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교사들은 인종적·문화적 변화에 상응하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제한된 여건 내에서 변화해야 할 대상으로서만 취급된 것이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학생에게 의무나 책임을 부과하는 규정으로써 교사들의 직업적 권위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인가? 교사들이 학생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방식의 징계와 규율로 교사들의 전문적 권위가 바로 세워질 것인가? 앞에서 제시한 미국의 사례를 톺아보면, 그렇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에 따르면, 조직 구성원의 자발적인 충성과 신뢰는 지도자의 구성원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와 탁월한 비전, 인간적인 매력으로부터 형성된다. 교사들이 학생과의 관계에서 직업적·전문적 권위를 세우는 일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이 문제는 지엽적인 규범적 맥락에서 해결될 것이 아니다. 교사들이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국가의 기획과 전폭적인 투자가 우선되어야 한다. 교사들이 인권친화적 학교에 대한 효능감을 느낄 기회가 확장되는 것도 중요하다. 인권의 사실적 급부로서 학교의 여건이 충족될 때, 학생인권과 교권의 지속가능한 상생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김범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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