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trauma) 혹은 스트레스성 사건에 노출된 후,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은 매우 다양하다.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불안 및 공포를 너머 임상적으로는 특징적인 양상이 매우 다양하다. 그 중 무쾌감, 불쾌감, 화, 공격성 또는 해리 증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외상과 관련한 진단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이다. PTSD는 한 가지 이상의 외상 사건에 노출된 후 특징적 증상이 발현된다. 어떤 경우는 공포에 기반한 외상사건의 재경험과 감정 및 행동 증상이 두드러질 수 있고, 어떤 경우는 무감동 또는 불쾌한 기분 상태와 부정적인 인지가 두드러질 수 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각성과 생리적 반응성이 두드러진다. 그 외에 해리 증상이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고, 앞서 기술한 증상들이 혼합돼 나타나기도 한다.
왕따·학교폭력 등의 외상 피해
학교 적응에 심각한 어려움 초래
외상사건(traumatic event)은 전쟁이나 신체적 폭력, 성폭력, 납치, 재앙, 차량 사고 등과 같은 위협적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심각한 폭행이나 부상은 없었지만 부적절한 성적 경험을 했거나 질병이나 수술 중 각성됐거나 아나필락시스(급성 알레르기) 쇼크와 같은 의학적 사건을 경험한 경우, 그 외에 사건을 목격했거나 간접적으로 노출된 경험도 해당된다. 최근 임상 현장에서 만나는 외상 희생자들은 대인관계적 외상인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아동, 청소년의 경우에는 또래관계의 직·간접적 폭력이나 왕따 등의 경험으로 인한 외상 피해로 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PTSD 증상은 대개 외상 사건 후 3개월 이내에 시작돼, 수개월에서 수년간 지속될 수 있다. 외상경험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성인들은 자연스러운 정신적 치유 과정을 거치고 몇 개월 이내에 외상으로 인한 증상들이 상당 부분 개선된다. 하지만 일부는 12개월 이상, 가끔은 50년 이상 증상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외상 및 스트레스 요인이 성폭력이나 신체·정신적 학대 등 대인 관계적 특성을 띄거나 그것이 의도적인 것일 때는 그 상처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외상으로 인한 상처가 드러나는 양상도 다양하다. 어린 아동은 놀이를 통해서 외상을 직접 혹은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재경험 증상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 아동이 지니는 생각이나 감정 표현의 한계로 인해 기분변화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아동, 청소년의 경우 과민하거나 공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또래관계나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PTSD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인 재경험은 침투적인 이미지나 악몽의 형태로 초기의 외상이 다시 활성화되고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예상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충격적 장면의 회상, 즉 플래시백(flash-back)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주의집중을 흩트리고 지적활동을 방해하며, 고통스러운 감정을 유발하는 등 학업과 같은 주요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상당한 지장을 가져온다.
초기 외상의 재발현에 대한 두려움
예민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해
또 다른 주요 현상은 해리(dissociation)인데, 이는 고통스러운 사건에 압도되지 않도록 내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해리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경험될 수 있는 우울, 불안, 화 등의 정서조차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정서에 무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이 때문에 대인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있다.
항상 외상과 관련된 자극을 회피하는 양상도 나타난다. 이들은 외상 사건에 대한 생각이나 기억, 느낌, 대화를 피하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관련한 기억이 떠오르도록 하는 활동이나 상황, 물체, 장소, 사람 등을 계속해서 피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건과 관련된 인지 또는 감정의 부정적 변화가 시작돼 급기야 외상 사건의 중요한 부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을 겪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자신, 타인, 미래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예상을 하고, 자신 또는 타인을 비난하며, 정체성이 부정적으로 변한다. 과거에는 즐거웠던 활동들에 흥미를 상실하고 참여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더 이상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쉽게 화를 내고 공격적인 언행을 보이며 예민해진다. 그 외에도 수면의 어려움이나 자해 및 자살 행동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도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외상으로 인한 고통과 그 위험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는 남편이 47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사해 홀로 어린 아들과 딸을 키웠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일이 생기면 우리는 선택이라는 심판대에 섭니다. 심장과 허파를 가득 채우는 허무, 그래서 생각을 마비시키고 심지어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하는 공허함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비극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인지.” 이 말은 외상으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가히 좋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억울한 일로 힘들고 불행한 나에게 선택하라고? 이런 일을 당한 것도 힘들고 억울한데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는 내가 문제라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외상 피해자들은 사건, 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장소, 더 나아가 세상과 타인을 피해 고립돼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셰릴 샌드버그의 말은 PTSD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알려진 인지행동치료의 주요 기법을 반영하고 있다. 곧, 외상사건으로 인한 고통을 심화시키는 생각을 찾아 수정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는 새로운 생각을 통해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외상사건 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외상사건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야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불가능한 바람은 증상 앞에 더욱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게 하고 결국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외상의 희생자들은 ‘왜’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고자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지만 혼자서 곱씹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을 잘못해서’ 등 대체로 자책과 죄책감, 수치심으로 끝이 난다. 사건과 경험에 대한 적절한 질문과 올바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자책보다는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 필요한 것이다.
고립과 거절의 삶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가져야
외상의 희생자들은 사람들이 외상사건을 겪은 자신을 ‘불쌍한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재수없는 사람’ 등 부정적으로 보고 피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타인 및 세상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 고립돼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설사 주변에 자신을 도우려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가엽게 볼 것이 두려워 도움을 거절한다.
끔찍한 사건과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 이면의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더불어 사는 세상, 나와 달라 다른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들에게 손을 뻗고 잡아야 한다.
외상으로 인한 고통이 삶의 극한을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나쁜 일은 우리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쁜 일을 보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나쁜 일을 보는 나의 생각이 변하고, 사건에 대한 반응이 변하는 과정에서 외상은 치유되고, 더 나은 다음의 삶이 주어진다. 외상으로부터 회복돼야 함을 인정하고, 회복될 수 있으리라 소망하며, 회복되기를 결단해 치유의 과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외상 치유의 시작은 회복되기를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