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韓 “국권상실 외부세력 탓, 내부 반성 없어”

2005.01.25 10:12:00

동아시아 민중의 반제국주의 운동

中 5・4운동에 미친 3・1운동 영향 언급 없어 국제적 역학관계 소홀 日 한·일 반제운동까지 상세·객관적 기술, 역사 인식 균형감 키워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운동의 성패는 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명치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에 성공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청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宗主權)을 일축하고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구축의 일환으로 조선에 대한 개혁(갑오개혁)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획득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사실상의 半식민지로 만들었으며 1910년에는 조선을 강제로 일본에 병합시켜버렸다. 
  이에 반해 청은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열강의 각종 이권쟁탈과 세력권 분할상황에 처했다. 그런데도 청은 정치개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 1898년의 무술변법(戊戌變法)마저 제압하고 낡은 왕조체제 유지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은 붕괴되고 중화민국으로 탈바꿈되었다. 중화민국 역시 북양(北洋)군벌의 할거와 전쟁,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 등으로 부국강병에 실패하였다. 그로 인해 중국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에게 거대한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주변국가로의 침략은 당연히 주변 민족국가의 격렬한 反제국주의・反침략전쟁의 민중운동을 야기했다. 조선의 경우 국내에서는 의병운동과 3・1운동이 일어났고 중국 및 만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중심의 독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5・4운동을 비롯해 국민당과 공산당을 두 축으로 한 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민중의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조선과 중국민중에게 엄청난 상처와 피해를 안겨주었고, 조선과 중국은 반제(反帝)운동 속에서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모색하였다.

조선민중의 대표적인 반제(反帝)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배경에 관해,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일제의 혹독한 무단통치가 계속되었다는 점, 해외동포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 국권을 침탈당한 후에는 독립이 민족의 공동목표가 되었다는 점, 과거와 달리 강력한 민족 응집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 등을 거론하고 있다. 즉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을 국내의 원인과 해외 한민족의 활동에서 찾고 있다.
 당시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국제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에 관해서는, ‘민족 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칼럼을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당시 3・1운동이 어떠한 국제 분위기 속에서 거국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즉 3・1운동의 국제 역학적 관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교과서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아시아 민중의 민족운동이나 반제운동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3・1운동 시기와 달리, 개항 이후 근대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역량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국론을 합의하지 못한 채 문호를 개방한 점, 그 결과 여러 외세가 개입하게 되면서 우리 민족 스스로 국가운영 및 발전의 방향을 확고히 하지 못한 점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역량을 모으지 못했다는 부분은 3・1운동의 배경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당연히 1910년 국권상실의 배경과 원인으로 서술되어야 마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국권침탈과 관련해서 “의병활동을 잠재운 일제는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일본에 합치자는 각종 청원서나 성명서를 발표하게 하였고・・・, 군대와 경찰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매국내각과 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라고 하여, 우리가 국권을 상실하게 된 내부의 잘못이나 내적 원인 등에 대해서는 거의 분석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국권을 강탈해간 일본의 부당함・강압성・불법성 등을 강조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뿐 국권상실의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묻기보다는 외세의 침략에 돌리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당시 우리가 거국적으로 일본에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한 혹독한 자아반성과 당시 우리 사회 내부의 결함이나 무능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기반성보다도 외세에 대한 부당성 폭로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역사 서술방식은, 국권상실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향후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역사교육 본래의 목표와도 상당부분 벗어나 있는 셈이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달라진 세계정세와 더불어 러시아혁명, 일본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21개조 요구,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일본 내 쌀 소동 등을 국제관계 속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베르사유조약, 국제연맹의 탄생, 각국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을 설명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반제 민중운동, 특히 한국의 3・1독립운동,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민족운동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는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민족자결 주장이 점점 고조되면서 새로운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기술하면서 3・1운동도 그러한 민족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적어도 일본 교과서에서는 한국 교과서와 달리, 국제관계 속에서 3・1운동을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3・1운동을 기술한 일본 교과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가두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 운동은 평화적으로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일본은 군대나 경찰의 힘으로 이를 탄압했다. 이에 대해 조선인들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독립운동이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운동은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약 200만 명이 참가해서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민족의 힘을 내외에 과시했다. 독립운동은 그 후에도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상해 등에서 계속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의 5・4운동에 관해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산동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1919년 5월 4일 북경학생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調印) 반대와 일본상품의 불매를 외치면서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노동자나 상인도 데모에 참가하면서, 이 운동은 외국의 제국주의와 국내의 봉건세력에 반대하는 혁명운동으로 전화되어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때 손문은 중국국민당을 만들어 혁명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나 농민의 운동도 고조되었고 1921년에는 중국공산당도 만들어졌다. 손문은 소련이나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고 혁명운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손문이 죽자 국민당의 장개석은 자본가・지주나 외국세력과 결탁해서 1927년 남경에 국민정부를 만들어 중국공산당과 대립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5・4운동의 발생배경으로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신문화운동, 러시아 10월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미국 등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여 중국인의 반제국주의 정서를 자극했다는 점, ㉡북양군벌 정부가 제국주의에 의존하여 국가의 이권을 팔아넘기고 국내적으로 토지와 광공업을 약탈하거나 세금을 증액하여 인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점, ㉢군벌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인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어 계급모순이 날로 첨예화되었다는 점,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민족공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자 계급이 급증하고 노동자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점, ㉤신문화운동이 중국인민의 사상을 해방시켜 청년학생들의 애국운동을 전개하도록 했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5・4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으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중국 대표단이 제기한 중국 내 제국주의의 모든 특권의 폐지, 일본이 군벌정부에게 제기한 21개조 요구의 철폐, 독일이 산동성에서 지니고 있던 특권의 환수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 ㉡특히 독일의 특권이 일본에게 넘겨지기로 결정되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5・4운동의 역사적 의의로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하였다는 점, ㉡이 운동 과정에서 중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정치무대에 처음 등장해서 위대한 역량을 과시했다는 점,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점, ㉣5・4운동은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부분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신(新)민주주의 혁명의 시작이라는 점을 열거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조선의 3・1운동이 5・4운동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당시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3・1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항일독립군의 조직으로 이어져 만주 및 중국 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에서의 5・4운동은 공산당의 탄생과 국민혁명의 사상적 밑바탕이 되어 이후의 동아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작용을 했다.
  동아시아 민중의 반제운동에 대한 한・중・일 각국 역사 교과서의 특징들을 비교해보면, 한국 중학교 교과서는 지나치게 일국사 중심으로 기술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당시의 국제정세는 물론이고 한국 내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것이 차지한 위상이나 역학관계 등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 교과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외부세력의 침략성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정세를 부분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 서술이 지나치게 중국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교과서처럼 일국사적인 서술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단순히 일본이라는 一國史 서술에 그치지 않고 주변 민족국가의 반제운동까지 비교적 상세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이 처한 위상과 일본 내 역사적 사건들의 국제적 연관성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주변 민족국가의 대응양상까지도 파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균형감 있는 역사인식을 갖도록 하고 있다. 즉 일본 역사 교과서는 ‘국제관계 혹은 세계사 속에서의 일본사’라는 기본관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함으로써 일국사적인 시각을 극복하고 좀 더 넓은 역사적 안목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사진> 중학교 국사교과서 267쪽 - 유관순 열사의 영정과 동상 사진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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