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전반에 혐오가 넘쳐난다. 인터넷에서는 ‘젊은 척하는 영포티’, ‘라도인임? 긁혔나 보네?’, ‘이러니까 맘충 소리 듣는 거임’, ‘딸피· 틀발진 쉴 새 없이 사고 치는 노인’, ‘딸배거지 극혐, 나만 그럼?’, ‘너네 아빠 200충? 300충?’ 등 특정 집단을 향한 조롱과 혐오가 담긴 영상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익명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천 개씩 댓글이 달린다.
‘여자 혹은 남자라서’, ‘어리거나 젊거나,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기득권 세대여서’, ‘키가 작아서’. ‘내가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국적이 달라서’, ‘특정 직업·지역이라서’, ‘정치 성향이 달라서’….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내가 속하지 않은 누군가(혹은 집단)’를 향해 불편함·분노·적대감을 서슴없이 표현하며, 서로 헐뜯고 조롱하고 비난한다.
우리는 ‘혐오가 일상화된 사회’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게 되었을까? 왜 혐오 표현을 즐기는 걸까? 혐오는 어디에서 자라고, 어떻게 전염되며, 무엇을 먹고 커지는 걸까?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밈과 신조어 속에 숨겨진 혐오의 심리학을 통해 혐오 표현의 기원, 확산 메커니즘, 특히 혐오 문화에 취약한 우리나라의 특징 등을 살펴본다.
‘웃자고 한 말인데, 왜 그래?’ _ ‘재미’로 포장된 혐오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든 혐오는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다. 차별적·모욕적 단어들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밈·신조어로 유머러스하게 포장되어 죄의식 없이, 때로는 ‘함께 즐기는 놀이’로 가볍고 자연스럽게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 표현이 밈·신조어와 결합하는 순간, 파급력은 커진다. ‘짧고 강렬한 메시지’는 즉각적인 공감을 얻으며 SNS를 통해 빠르게 퍼지고, ‘좋아요’와 ‘공유’를 먹으며 확산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외모·출신·가정환경·국적·정체성이 다른 어떤 아이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취급한다. SNS에서 본 혐오 표현을 비판의식 없이 따라 하고, 단순한 농담이나 장난처럼 소비하며, 무의식적으로 혐오 메시지를 내면화한다. 아이들은 ‘그 속에 담긴 본질적 의미’를 모른 채 그저 ‘함께 즐기는 놀이’에 동조하며 웃고 즐긴다. ‘장난이었어요’,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라는 말로 폭력성·차별성을 희석하면서 말이다. 간혹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진지충이냐’는 또 다른 조롱이 따라온다.
이처럼 혐오는 ‘누구와 함께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된다. 특정 집단(소수자·약자 등)을 ‘그들(Out-group)’로 규정하고, 비하하고, 낙인찍음으로써 ‘우리(In-group)’는 저들과 다르다는 경계를 명확히 하고 결속을 다지게 한다. 편 먹고 차별하거나 공격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혐오는 감정이 아니라 메커니즘의 문제이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혐오 표현을 쓰지 말자’라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혐오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 감정이 어떻게 왜곡되고 편향되는지 분석하며, 혐오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그걸 먹으면 죽는다’ _ 최초의 생존 감정으로서의 혐오
심리학에서 ‘혐오’는 단순한 ‘싫음’이나 ‘불쾌감’과 다른, 매우 독특한 정서로 분류된다. 혐오는 인간이 진화하면서 가장 먼저 획득한 감정 중 하나였다. 수천 년 동안 백신·항생제 없이 살아온 인류에게 부패한 고기나 오염된 물처럼 먹으면 안 되는 것, 곰팡이·배설물·사체처럼 병을 유발할 수 있는 오염물, 독이나 기생충 등은 치명적 위험이었다.
뇌는 이런 위험을 감지하면 즉각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리고 뒤로 물러서며 구토 반응을 일으켰다. 즉각적으로 반응할수록 생존 확률은 높아졌고, 결국 혐오를 잘 느낄수록 오래 살아남았다. 이처럼 초기 혐오는 ‘목숨과 직결된’ 매우 직관적이고, 본능적이며, 생물학적인 정서였다. 결국 혐오는 생존을 위해 잘 기능해야 했던 ‘뇌의 경보 시스템’이자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장치’였던 셈이다.
문제는 세대를 통과하며 진화한 혐오가 이제 오염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적용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보며 ‘더럽다’, ‘이상하다’, ‘불쾌하다’라고 느끼는 순간, 뇌는 부패한 오염물에 쓰던 회피 반응을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한다.
즉, 인간의 뇌는 타인을 ‘물리적 오염물’처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염물로 인식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더럽고 불쾌한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공격·조롱·차별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여긴다. 즉 혐오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도덕적 판단을 동반한 혐오로 변환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장된 혐오’라고 부른다.
‘한 번 더럽혀진 것은 영원히 더럽다’ _ 폴 로진의 ‘혐오의 도덕화’
혐오 연구의 대표 학자인 폴 로진(Paul Rozin)은 혐오가 어떻게 사회적·도덕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는지 분석한 인물이다. 로진에 따르면 생물학적 혐오(부패·오염 회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행동·규범·집단을 ‘더럽다·추하다·타락했다’로 판단하는 도덕적 혐오로 변화했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반응은 ‘입에서 뱉어내자’에서 출발해 ‘마음(심장) 심지어 영혼에서 꺼내버리고 싶다’로 이어진다.
로진은 혐오를 ‘오염’으로 설명한다. 가장 유명한 실험은 ‘바퀴벌레 물컵 실험’이다. 깨끗한 물 한 컵에 바퀴벌레를 살짝 담갔다가 뺀 후, 물을 끓여 완전히 소독하고 여과해서 실험자들에게 제시했다. 완전히 무균이며, 위험 요소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한 번 더럽다고 느끼면 그것은 영원히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오염 심리’와 혐오 대상과 잠깐만 스치더라도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판단하는 ‘접촉 금기 현상’ 때문이다.
‘오염 심리’와 ‘접촉 금기 현상’은 도덕적·사회적 혐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정 집단이 ‘오염된 존재’로 분류되면,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가 낙인찍힌다. ‘우리는 깨끗하고, 저들은 더럽다’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차별·적대·혐오 표현이 정당화된다.
로진의 ‘바퀴벌레 물컵 실험’은 혐오가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낙인’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논리적·위생적으로 오염이 제거되었음을 알아도 ‘더럽다’는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혐오 반응은 논리·이성·과학적 설명을 이기지 못한다. ‘저 집단 때문에 피해를 봤어, 저들은 틀렸어, 저들은 추하고 더러워, 저런 사람들과 섞이면 안 돼’ 등 극단적으로 비논리적이고, 고집스럽고, 폐쇄적이며, 갈등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뇌과학으로 본 혐오 _ 혐오의 본부는 ‘섬엽’
우리 뇌는 여전히 더럽고, 추하고, 위험한 것을 보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뒷걸음쳐 멀리 도망가고, 구토하여 입 밖으로 내뱉는다.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며, 본능적이다. 원시 시대의 생존 전략을 지금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혐오를 담당하는 뇌 부위는 섬엽(insula)이다. 섬엽은 구토감·역겨움·신체적 거부감과 관련된 원초적 감정을 처리한다. 혐오 상황이 오면 뇌는 섬엽을 활성화하여 ‘위험해! 가까이하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 몸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혐오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거 먹지 말자. 근처에도 가지 말자’라며 학습을 강화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했으므로 ‘기억 강화 효과’는 강력했고, 그 결과 혐오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각인되기 쉬웠다.
혐오가 사회적·도덕적 혐오로 확장되면서 섬엽 역시 사회의 ‘도덕적 질서’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섬엽은 ‘사회적 혐오’를 느낄 때도 ‘오염된 음식’을 보았을 때처럼 처리한다. ‘더럽다 → 위험할 수 있다 → 피하자’라는 신체적 혐오와 ‘저 사람은 부정한(오염된) 사람이다 → 우리 공동체에 위험하다 → 거리를 두자’라는 도덕적 혐오의 패턴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혐오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뇌 수준에서 ‘진짜 혐오’였던 것이다. 즉 인간의 뇌는 물리적 오염과 도덕적 오염을 동일한 네트워크로 처리한다. 이 때문에 혐오는 강력하며, 한 번 굳어지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도덕적 분노가 만들어낸 ‘정당한 혐오’ _ 하이트의 신성-오염 가치체계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한 방울의 오염은 전체를 망친다’는 로진의 오염 원리를 ‘도덕적 오염’으로 확장하여 정치·윤리·규범에 적용했다. 그는 오염을 회피하려는 생물학적 본능(혐오 감정)이 도덕의 기초라고 본다. 혐오라는 감정은 원래 기생충과 독소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진화했지만, 이제는 ‘도덕적 순수함(신성)’을 지키고 판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이트는 <바른 마음: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에서 ‘신성-오염 가치체계’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떤 행동이 더럽다고 느껴진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도덕적으로도 틀렸다고 믿게 된다.
조너던 하이트, <바른 마음(2012)>, p. 80
부정부패한 사람을 보며 “썩었다”라고 말하고, 아동학대·폭력·배신·착취를 보며 역겨움이 올라오는 것이 바로 ‘신성-오염 가치’이다. 하이트는 도덕 판단이 대부분 직관적이라고 보았다. 혐오(위생·성적·문화적·도덕적)를 느끼는 순간 섬엽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고, ‘도덕적으로 틀렸다’는 판단을 즉각적으로 일으키며, 혐오 감정이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자동성 때문에 혐오는 통제하기 어렵고, 사회 갈등은 장기화된다.
결국 누군가를 혐오하는 과정은 논리보다 ‘직관’이 먼저 작동한다. 그래서 혐오는 이성적 설명이나 교육적 설득으로 쉽게 꺼지지 않는다. ‘바퀴벌레 물컵 실험’이 보여주듯, 한 번 형성된 혐오는 대상에 대한 평가 전체를 오염시키며, 관계의 회복 가능성마저 길게 잠식한다. 오늘 한국 사회가 세대·성별·정치·집단 간 갈등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한 번 생긴 균열이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원초적 감정에 인터넷과 SNS가 어떻게 기름을 붓는지, 왜 한국 사회가 유난히 혐오에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을 혐오의 확산과 회오리로부터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깊이 살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