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각한 폭력 사태만 아니라면 교사에게 어떤 민원도 하지 않겠다.’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보육기관·교육기관에 처음 보내게 되었을 때 내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다.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로 15여 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학부모와 교사를 만나왔다. 그때 체득한 것은 나쁜 학부모도 나쁜 교사도 사실은 전체 인원에 비하면 극소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들 교육하기에도 바쁜 교사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고, 잦은 전화로 극성 학부모로 보이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면 엄마도 초등학교 1학년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면 엄마도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법! 등굣길부터 화장실 사용하는 것 하나하나까지, 아직 어려 보이는 우리 아이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아이라도 걸핏하면 잘 우는데, 어려움이 있어도 말도 못 하고 있으면 어쩌나.’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신학기 상담까지 기다렸다가 담임선생님께 궁금한 걸 여쭤보았다. 다행히 선생님은 친절하게, 저학년 아이들은 이래저래 잘 운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가 말로 표현할 수 있게 잘 지도해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상담이 끝나고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감이 더해졌고, 그렇게 아이와 나는 초등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1학년 엄마로서 학교에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시작한 학부모회 활동은 도움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부모로서, 나 개인으로서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다양한 학부모 연수를 통해 교육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고 공교육만으로도 건강한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 스스로 교육의 주체로서 성장해 학교의 교육을 뒷받침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 학교가 아이만 키우는 게 아니라 부모도 키우는 곳이구나’라고 실감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저학년 아이들 교실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좋은 프로그램인데 늦게 등교하는 아이들은 참여가 어렵다’며 도서실 수업시간을 열어주었고, 그래서 아예 학교 도서실 수업시간에 ‘책 읽어 주는 엄마’ 선생님이 좋은 책을 선정해서 읽어 주는 활동을 더 확장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림책만 읽어 주는 게 식상할 즈음에는 <김수한무> 책을 읽고 ‘내 이름 팔찌’도 만들고, 특별 인형 마당극 <떼루떼루>를 기획해서 공연하였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재미있게 봐 주시고 ‘엄지척!’ 해 주실 때면 엄마들도 어깨가 으쓱해지고 행복해졌다.
돌이켜보면 이런 활동들이 가능했던 건 선생님들이 학부모에게 학교 안의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열림이 아이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어쩌면 선생님들에게도 뜻밖의 기쁨이 되었다. 소통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닐까. 문을 여는 것. 그런데 그 문이 자꾸 닫히고 있다.
엇갈리는 교사와 학부모의 언어
학부모회 활동을 하면서 이렇게 기분 좋은 일만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학부모회를 통해 개별 아이의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들도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 해당 학부모를 다독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학교나 선생님들의 입장을 설명해 주면 어느 정도 마음을 푸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학부모회가 학교 편만 든다며 못마땅해하고 다른 학부모들에게 뒷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학부모회의 중재가 학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또 어떤 때는 이야기를 듣다가 같은 학부모로서 선생님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상담이 상시 신청 방식으로 바뀌면서, 담임선생님에게 먼저 전화를 드리면 부담을 드리는 게 아닐까 조심하는 학부모들이 생겨났다. 한 학부모는 평소 아이가 얌전하고 내성적이라 학교생활은 무난하지만, 교우관계를 어려워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던 터였다.
걱정 끝에 담임선생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시작부터 “○○이 같은 친구 어머님이 상담이 왜 필요하세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이가 내성적이라 교우관계가 걱정된다고 했더니 “○○이는 내성적이라 발표를 조금 어려워하지만, 친구와 사고 치는 아이는 아니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좋게 해석하면 아이의 학교생활이 무탈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선생님 나름의 농 섞인 표현이었겠지만, 어렵게 상담전화를 드린 그 엄마로서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문제아가 아니면 상담을 신청하면 안 되는 건가, 아이의 발달에 대해 궁금해 한 나는 너무 예민한 엄마인 건가, 선생님을 귀찮게 해드린 건가.’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일부 악성민원에 시달리며 극도로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교사의 언어와 아이의 평범한 성장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학부모의 언어가 서로 전혀 다른 주파수에서 겉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사는 바쁜 일과와 민원에 대한 부담 속에서 ‘문제 상황 예방’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학부모는 교육 전문가로서의 선생님에게 내 아이의 발달과 성장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없는데 이런 말을 꺼내면 ‘예민한 부모’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위축된다. 원래 교육이란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힘을 모아야 교육적 효과도 더 큰 법 아닌가? 문제가 있건 없건 아이의 정상적인 발달을 함께 점검해 나가는 소중한 시간이 교육상담일 텐데, 갈등과 민원을 피하려는 방어기제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활동으로서의 상담마저 위축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악성민원이 만든 소통의 장벽
학부모회에서 임원을 맡고 나서는 교장·교감선생님과도 자주 면담을 하게 된다. 우리 학교 학부모회에서는 대의원회의나 다양한 채널(밴드·카페 등)을 통해 활동 계획을 세우고, 학교와 의견을 조율하며, 한 해 사업을 꾸려 나간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고민을 담은 학부모들의 제안도 적지 않다.
‘운동부를 활성화하자’,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하자’, ‘아이들 운동 시간을 확보하면 좋겠다’ 같은 의견들이다. 학부모회 선에서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이라 학교 관리자분들께 의견을 전달하면, 학교 사정상 예산이나 인력의 한계로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학부모회가 다시 해당 학부모에게 전달하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학부모는 학교와 학부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통역사’가 된 기분이 든다. 그런데 꼭 이래야 할까? 안 되는 건 왜 안 되는지, 학교가 직접 공식 채널을 통해 사정을 설명하고 대안을 함께 고민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학부모들도 명확한 설명을 들으면 이해한다. 오히려 소통의 공백과 침묵이 오해를 키우는 법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학교 측에 말씀드린 적도 있지만, 그 설명조차 또 다른 민원이나 논란으로 번질까 봐 조심스럽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소통의 부재를 막으려다 소통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악순환이다.
학교의 언어는 항상 책임 소재와 예산, 교사의 업무 과중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학부모의 언어는 왜 소통하지 않는지, 공교육으로서 학교의 책임과 노력에 관해 묻고 있다. 여기에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악성민원이라는 장벽이 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문이 열리면 신뢰가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교사도, 학부모도,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의 유일한 목표다. 서로를 신뢰하는 건강한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 대화의 방식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지원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우선 교사 개인이 악성민원을 온몸으로 감당하지 않도록, ‘민원 대응 시스템의 일원화’와 ‘공식적 소통 채널’이 학교 현장에 확실히 안착되어야 한다.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 본연의 임무와 정상적인 성장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먼저 마련되어야, 학부모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여유도 생기기 때문이다.
더불어 학부모의 불안을 건강한 참여로 전환할 수 있는 ‘학교 주관의 정기적인 소통 공론장’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학교 운영의 예산이나 행정적 한계를 투명하게 공유하는 ‘정책 설명회’나 ‘정기 간담회’가 공식화된다면, 학부모 역시 ‘불안에 기반한 민원’ 대신 ‘적절한 제안’을 건네는 성숙한 교육 주체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변화의 출발점은 거창한 시스템 개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학기에 한 번, 학교 운영의 고민을 학부모와 함께 나누는 투명한 자리 하나. 문제가 있건 없건 아이의 발달을 함께 점검하는 신뢰 어린 상담 한 번. 이러한 안전한 울타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면, 지금처럼 학부모회가 위태로운 통역사를 자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문이 열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림책을 듣던 아이들, ‘엄지척!’을 외치던 선생님들, 어깨가 으쓱해지던 엄마들. 그 아름다운 장면이 가능했다면, 대화를 통한 더 큰 신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분명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