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첫 산문집 『붓끝과 칼끝』(이로제, 2026)은 「붓끝과 칼끝 사이」라는 책머리 글로 문을 연다. 작가는 그 글에서 두 개의 끝을 이렇게 풀어 놓는다. 붓끝은 사람을 향한 시린 헤아림이고, 칼끝은 안으로 무너지는 나약함을 베어내는 엄정한 다스림이다. 하나는 바깥을 향하고 하나는 안을 향한다. 하나는 세계를 섬세하게 더듬고, 하나는 자신을 단호하게 깎는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몸의 끝에서 일어난다. 붓을 쥔 손과 칼을 쥔 손은 같은 손이다. 그렇다면 칼로 그리고 붓으로 베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글은 두 끝의 쓰임이 서로 뒤바뀌는 자리에서 이용철의 수필을 읽으려 한다.
좋은 수필을 읽고 나서 남는 것은 생각의 줄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몸이 세계와 부딪친 자국이다. 수필은 관념을 전하는 글이 아니라, 몸과 세계가 만난 흔적을 언어로 기록하는 예술이다. 작가는 ROTC 장교로 화천 백암산의 눈길을 걸었고, 30여 년 교단에 섰으며, 무예로 몸을 벼려 왔다. 그에게 이 명제는 수사가 아니라 이력이다. '문무일체(文武一體)'라는 부제는 정신과 몸을 나누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이 글은 수록작 「시골 이발관」과 「청음수행淸音修行」을 붓끝과 칼끝 사이에 놓고 읽는다. 사물은 작가의 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새롭게 보았는가.
몸으로 세계를 갖고, 감각으로 다시 보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출발점은 현상학이다. 그는 사물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사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물었다. 그는 세계가 생각보다 먼저 몸에 주어진다고 보았다. 몸은 정신이 부리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갖는 일반적 수단이다. 의식은 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보는 자이면서 보이는 자이고, 만지는 손은 곧 만져지는 손이다. 만년의 그는 이 얽힘을 '살(la chair)'이라 불렀다. 나와 세계는 같은 살로 짜여 서로에게 스며든다.
랭보는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며 이치에 맞는 착란을 거쳐 견자(見者)가 된다'고 썼다. 견자는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인식으로 세계를 다시 보는 사람이다. 그 핵심은 감정의 전복이다. 관습이 정해 준 감정의 자리를 뒤집을 때 세계는 처음 보는 얼굴을 드러낸다. 두 사유를 이용철의 제목에 겹쳐 보면 흥미로운 대응이 생긴다. 몸으로 세계에 스며드는 일이 붓끝의 헤아림이라면, 익숙한 감정과 인식을 베어내고 다시 보는 일은 칼끝의 다스림이다.
칼끝이 지나간 자리 — 「시골 이발관」
「시골 이발관」은 문자 그대로 칼끝의 공간이다. 가위와 면도칼이 날마다 사람의 몸에 닿는다. 그러나 수필에서 칼은 베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것이다. 화자는 문을 여는 순간부터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이 공간을 맞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훅 끼쳐오는 비누 냄새와 눅눅한 온기, 그것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나를 한순간 멈춰 세우는 마법 같은 풍경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천장 아래로 빛바랜 세월이 촘촘히 박혀 있다. (135~136쪽)
이발관은 눈보다 코와 피부에 먼저 나타난다. 냄새와 온기가 가쁜 숨의 몸을 멈춰 세운다. 세월은 관념이 아니라 천장 아래 촘촘히 박힌 물질로 감각된다. 지각이 사유에 앞선다는 메를로-퐁티의 명제가 문장의 순서 그대로 놓여 있다.
이 수필의 가장 깊은 사유는 이발사의 몸에서 나온다. 어린 날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진 사내는 운명을 탓하는 대신 가위를 잡았다. 절뚝이는 걸음에는 열이 오른 첫아이를 업고 산길을 달려 내려가던 밤이 새겨져 있다. 메를로-퐁티는 습관을 몸에 침전된 앎으로 보았다. 수십 년 가위를 쥔 손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알고, 그 앎은 상처와 함께 쌓인다.
이발사의 가위질과 아내가 내어주는 면도 거품에는 그 비린 세월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고요가 깃들어 있다. 늙은 손님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면, 아내는 정성스럽게 거품을 내고 날카로운 면도칼을 세운다. 몇십 해를 다듬어온 손길은 투박하지만 부드럽다. (137~138쪽)
손과 칼과 손님의 얼굴이 하나의 살로 이어진다. 칼날은 날카롭지만 손길은 부드럽고, 그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 '주름지지만 맑은 살결'이 드러난다. 화자는 삶의 모진 바람도 그렇게 깎여 나가기를 바란다. 여기서 칼끝은 상처를 내는 날이 아니라, 상처를 견딘 몸만이 쥘 수 있는 다스림이 된다. 사유는 피부 위에서,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태어난다.
사물들도 몸을 얻는다. 연탄 화덕 위 양은 물통의 김은 '이 집의 느린 맥박'이 되고, 끓는 물소리는 가락이 되며, 젖은 바람은 마음의 딱지를 녹인다. 공간 전체가 숨 쉬는 하나의 몸이고, 그 안에 화자의 몸이 놓인다. 거울 장면은 이 수필의 정점이다.
거울 속에는 이마가 자꾸 넓어지는 한 사내가 앉아 있다. 거울 밖의 이발사도, 수건을 건네는 그의 아내도 모두가 시간이라는 커다란 붓이 그려낸 풍경의 한 조각이다. (138쪽)
보는 '나'가 거울 속에서 보이는 '한 사내'가 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가역성이다. 화자는 이발관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눈이 아니라, 이발사 내외와 함께 늙어 가는 풍경의 한 조각이다. 눈여겨볼 것은 그 풍경을 그린 것이 '시간이라는 커다란 붓'이라는 점이다. 칼끝의 공간에서 붓끝의 이미지가 피어난다. 두 끝은 이 장면에서 하나로 만난다.
이 수필에는 견자의 전복도 조용히 일어난다. 벽에 붙은 선데이서울 풍의 사진은 상식대로라면 민망함의 대상이다. 작가는 그것을 젊은 날의 한 자락을 붙든 애틋한 풍경으로 다시 본다. 낡음과 정체는 흔히 쇠락의 표지다. 그러나 작가에게 바뀌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늙어 가는 이들에게 위로이자 축복이다. 연통의 연기는 하늘로 오르는 선녀이자 땅에 남은 나무꾼이 되어 떠남과 남음을 함께 품는다. 랭보처럼 격렬하지는 않지만, 익숙한 감정을 비틀어 사라져 가는 것들을 '거룩한 섬'으로 다시 세운다는 점에서 견자의 시선과 맞닿는다. 문을 나서며 화자는 머리칼은 짧아졌지만 '삶을 견디는 마음 근육'은 단단해졌다고 말한다. 마음을 근육이라 부르는 이 표현에 몸과 정신을 나누지 않는 작가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
귀를 씻는 칼끝 — 「청음수행」
「시골 이발관」의 칼끝이 남의 몸에 닿는 칼이었다면, 「청음수행」의 칼끝은 자기 안으로 향한다. 작가는 산 밑에서 너무 많이 말하고 너무 많이 들었기에 입을 닫고 귀를 씻고 싶었다. 그가 처음 듣는 것은 흙과 물과 새의 소리다. 걸음마다 발밑에서 흙의 소리가 올라오고, 몸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땅의 지혜를 배운다. 몸이 땅에 닿는 감각이 곧 앎이 된다.
수행은 곧 깨진다. 노인의 휴대용 라디오에서는 트롯이, 산악자전거 청년의 블루투스에서는 신세대 음악이 흘러나온다. 하산하는 무리의 목소리는 확성기 같다. 작가는 이어폰을 꺼낸다. 그런데 소음을 막자 산의 소리도 함께 사라진다. 다람쥐가 도토리 갉는 소리까지 잃고서야, 작가는 감각의 문을 닫는 일이 세계를 잃는 일임을 몸으로 안다.
진정한 수행은 모든 소리가 있는 시장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밟고 있는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소리에만 귀를 열고 살았구나. (203쪽)
이것이 이 수필의 전복이다. 처음에 소음은 수행을 방해하는 적이었고, 고요는 소리 바깥에 있었다. 이제 고요는 소리를 지운 자리가 아니라 모든 소리를 받아들이는 내면의 상태로 옮겨 간다. 불쾌와 짜증이라는 익숙한 감정이 뒤집히면서 남을 탓하던 귀가 자신을 향한다. 세계를 새롭게 보기 전에 자신을 새롭게 보는 순간이다. 칼끝은 여기서 바깥의 소음이 아니라 안의 편협함을 벤다. 작가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굳어버린 신념'이다.
이어폰을 빼는 동작은 닫았던 몸을 다시 세계에 여는 일이다. 그러자 감각이 하나씩 열린다.
통도사 일주문을 지났다. 뜰에 홍매화가 피었다. 담장엔 소원 등이 바람에 날리며 울긋불긋했다. (203쪽)
짧은 문장들이 걸음처럼 이어진다. 금강계단에서 합장한 몸에는 오래된 소나무에서 징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나무가 실제로 징을 울릴 리 없다. 그것은 다시 열린 귀가 처음 듣는 소리, 감각의 질서가 바뀐 뒤에야 들리는 소리다. 무엇을 들었는가보다 어떻게 다시 듣게 되었는가가 이 수필의 몫이다.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보는 일이 몸으로 세계에 거주하는 일이라 했고, 랭보는 감각의 질서를 뒤집어 세계를 다시 보라고 했다. 이용철의 두 수필은 이 두 사유가 만나는 자리, 곧 붓끝과 칼끝 사이에 서 있다. 「시골 이발관」에서 작가는 마흔 해 동안 같은 의자에 앉아 온 그 몸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의 거룩함을 다시 보았다. 「청음수행」에서는 닫았던 귀를 다시 열어 자기 안의 편협함을 들었다. 「시골 이발관」에서 칼은 사람의 얼굴 위에 시간의 풍경을 그렸고, 「청음수행」에서 붓은 작가 안의 굳어버린 신념을 베어냈다. 칼로 그리고 붓으로 베는 이 뒤바뀜이야말로 익숙한 감각을 넘어 세계를 다시 보는 견자의 방식이다.
작가는 책머리를 이렇게 맺는다. 다시, 붓으로 마음의 먼지를 닦고 칼로 자신을 시퍼렇게 벼린다고. 두 수필을 읽고 나면 그 말이 수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의 수필은 생각을 전하는 글이 아니라 몸이 세계와 만난 흔적이다. 무엇을 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새롭게 보았는가. 이용철의 수필이 건네는 것은 그 다시 보기의 경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