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잠시 머뭇거린 자리

2026.10.29 14:21:40

옛 동료의 미소에서 되찾은 따뜻한 시간

퇴임 후 인생 제2막 어느 시월의 마지막 주 찾아가는 청소년 약물오남용 예방을 위한 체험 부스 운영에 반재능기부로 참여하였다. 학교에 들어서면 이제는 관리자보다 학생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절차도 없이, 아이들이 모인 현장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긴다. 교장이라는 직함을 내려놓은 자리에, 아이들과 마주하는 즐거움이 더 큰  탓인지 바로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이 체험활동은 강남지원청이 주최하고 민·관·학이 함께하는 교육사업으로, 점심시간 한 시간 동안 진행된다. 학생들은 소그룹으로 나뉘어 열 개의 주제별 부스를 돌아본다. 내가 맡은 주제는 마약 예방이다.

 

대마 성분이 들어간 젤리와 껌, 초콜릿과 캡슐, 드레싱과 차 등의 모형으로 평범한 간식처럼 보이는 제품에도 유해한 성분이 들어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하며 아이들의 시선을 모형에 모운다음 뇌의 보상회로를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는 어떤 행동 뒤에 즐거운 경험이 따라오면 이를 기억하고, 그 행동을 다시 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마약은 이 보상체계에 강하게 작용하여, 해로운 결과를 알면서도 사용을 반복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고르고, 질문에 답하다 보면 한 그룹의 시간이 금세 끝난다. 곧바로 다음 그룹이 밀려든다. 같은 설명을 거듭하지만, 듣는 아이들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수업이다. 옆을 돌아볼 틈도 없다.

 

그런 나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기다리는 분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그룹의 설명이 끝나자 그분이 다가왔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기억 속 어디쯤에서 분명히 만난 사람인데, 이름과 함께했던 시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바라보는 짧은 탐색 끝에 비로소 기억이 이어졌다.

 

내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었다. 이제는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단정한 옷매무새와 차분한 표정, 여전히 고운 모습에 지난날이 겹쳐졌다. 반가움이 밀려오는 한편,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상대에게도 미안했지만, 내 기억력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했던 날들이 그만큼 멀어진 탓일까.

 

독일의 심리학자 에빙하우스는 학습한 내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속도가 크다는 것을 설명했다. 10분 후 망각이 시작되고 한 시간 후는 50%, 한달후는 80% 기억이 급격하게 사라진다는 이론이다. 물론 학습을 설명한 미론이지만 기억의 망각은 동일하다. 또한 공자는 예순의 경지를 ‘이순(耳順)’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에 거슬림 없이 받아들이는 경지다. 일흔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했다. 이를 잃음의 자유와 같은 뜻으로 망각의 곡선 속에서 잊음의 자유 속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나의 나침판을 신뢰하며 살아 갈 것이다.

 

교장 선생님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함께했던 시간의 의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함께했던 날들의 온기를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기억은 다시 길을 찾았다. 그 길 끝에는 함께 학교의 하루를 꾸려가던 날들이 남아 있었다. 특별히 단정함과 아이들께 따뜻한 미소를 유지했던 선생님으로 기억되었다. 기억이 잠시 늦었다는 이유로, 반가운 만남이 서운했을 건데 체험부스가 끝난 뒤, 교장 선생님은 다시 나를 찾아와 환한 미소를 고치지 않았다. 연신 반가움과 따뜻함과 포용이 포함된 무한 응원의 소리가 담겨 있었다.

 

한때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던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한 사람은 학교를 이끄는 교장이 되었고, 한 사람은 퇴임 후 체험부스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할은 달라졌어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우리를 같은 현장에 서게 했다.

 

강미옥 신경주대 특임교수 moc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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