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교과서

2005.07.25 10:02:00

아버지가 글 동냥해 千字文 만들어

천명이 쓴 천자문


세조 때, 석학인 金守溫(김수온)은 책을 빌리면 책장을 찢어 옷소매속에 간직하고 길을 오가면서 외웠다. 외우고나면 버려버리므로 한질을 다외우면 책 한권이 없어지곤했다. 언젠가 申叔舟(신숙주)에게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古文選(고문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빌려왔다.


한데 가보로써 곁에서 놓지않던 이 책을 갚는다는 날 갚지않은지라 마르내에 있는 그의 오두막집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어보니 그 고문선을 낱장마다 찢어 벽과 천장에 누덕누덕 붙여놓고 있었다. 앉아 외우고 누어 외우느라고 그러했다고 했다. 김수온은 어릴적 서당 다닐때부터 외우고나면 책장을 버리는 奇癖(기벽)이 있었는데 그러해야만이 암송농도가 진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일로 그같은 교과서 파괴는 불가능한 일 이었다.


옛날 자제의 교과서를 만들어주는 부형의 노고만으로도 그러할 수가 없었다. 천자문 가르칠 나이가 되면 아버지는 글동냥이라하여 鄕試(향시)이상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이 고을 저 고을 찾아다니며 한 두자씩 써 달라해서 자식의 교과서를 만들었다.


어쩌다 알음을 통해 고명한 분의 글씨를 얻으면 그 글자만을 종이로 가려 아무나 보지못하게 하기까지 했다. 곧 글 잘한분의 글씨로 공부를 하면 그 呪力(주력)이 자제에게 옮을 것이라는 주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가공할 부형의 노력이 아닐 수 없고 그렇게 만들어진 교과서를 어떻게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


서지학자인 안춘근씨가 소장하고 있는 60여년전의 ‘천자문’을 본일이 있다. 표지에 ‘丁丑年(1937)3月1日 祝 李喜秀 白首文’이라 쓰인 이 천자문은 모두 60여쪽으로 한쪽에 16자씩 친필로 글씨가 씌어있었다. 돌맞이 하는 외손자의 면학과 장수를 비는 뜻에서 외가쪽 친척 친지 1000명이 각기 한자씩 써 모은 천자문인 것이다. 글씨체가 천변하는 이 천자문 한 글씨 마다 글자의 뜻과 쓴 사람의 이름 그리고 지장이나 도장을 찍고있는 이색 교과서인 것이다.


행실을 가르치는 家範(가범)들에 보면 책을 넘나든다는 것을 누어있는 아버지를 넘어다닌 것과 같이 여겨라했다. 그렇게 책을 소중히 다루는데는 그 책이 대대로 계승되는 물림책인 것과도 관계가 있다.


祖孫(조손)이나 師弟(사제)간에 일심동체를 다지는 결속민속으로 옷을 물리고 밥상을 물리듯이 책도 특정 후손에서 물리거나 유망하고 뜻있는 제자에게 물렸다. 옛 전적을 보면 이따금 그 책의 말미에 언제 어느 누가 어느 스승으로부터 책물림을 받아 언제 책을 떼었다는 기록이 물림순으로 연서 돼 있기도하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그 조상이 물린 책의 여백을 오려 그곳에 축문을 써서 읽는것이 효도요 제사효과를 높이는 방편이기도 했다.

글 외우는 소리


스승은 이 천자의 한자를 떼어 음독하는 것을 가르치고 이어 구독(句讀)하는 것을 가르치며 이어 뜻을 가르치고 넉자를 가르치면 넉자로 이룩된 문장의 대의를 가르친다. 음과 뜻을 익히면 암기시키는 수단으로 소리내어 음독을 시켰다. 읽는데 억양과 리듬이 있으며 그 리듬에 맞추어 전신을 움지기는 체조독서랄 수 있다. 훈장이나 훈장을 돕는 접장은 이 읽는 독수를 헤아려 정해진 수까지 읽지않을 수 없게 한다.


이 글을 읽을 때, 책을 보고 읽는것을 면강(面講)이라하고 책을 보지않고 암송하는 것을 배강(背講)이라 했다. 스승앞에 나아가 외우는 것을 면강, 혼자 눈감고 외우는 것을 배강이라기도 했다.


우리 옛말에 듣기 싫어도 말려서 안되는 세가지 소리가 있었다. 아기 우는소리와 다듬이 소리 그리고 글방에서 글외우는 소리다. 곧 촌락 공존의 에티켓으로 이 세가지 소음공해는 묵인되었기로 이를 삼호성(三好聲)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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