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주국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블랙박스

2006.01.16 14:38:00

동아시아 현대사와 만주 체험

20세기 제국주의 새 전략, 동북아 정치·경제사 열쇠
50개 민족 45개 언어 혼재, 조선인도 70여만 명 이주
잔학한 통치, 첨단의 근대를 동시에 지닌 역설의 제국
총독부 정책, 만주국 실험 통해 한국 근대국가로 유입
만주국은 어떤 나라? 만주국은 1931년 일제가-정확히는 남만주철도를 지킨다는 구실로 파병된 일본의 관동군이- 일본정부와 육군본부의 지령 없이 단독으로 오늘날 중국의 동북(이른바 만주)의 군벌 장학량 체제를 무력으로 쫓아내고(9.18, 혹은 만주사변), 그 이듬해 세운 나라이다. 1934년부터는 푸이(溥儀)가 황제로 등극, ‘만주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괴뢰국이라고 간주하는 당시나 전후의 역사기술은 준엄하다. 뒷날 일본이 중국에 대해 도발한 중일전쟁(1937-1945)은 1천만 명 이상의 중국인 희생자를 초래했다. 만주국은 전쟁의 배후기지가 되어, 이곳에서 살인적인 인적, 물적 동원, 생체실험 등 숱한 반인륜적인 행위가 있었다.
만주국에 대한 동북아 사회의 인식은 일종의 망각상태에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 앞에 종교적 신념으로 가짜라는 말을 붙이면서, 존재해서는 안 될 악몽으로 여긴다. 일본인들 중에는 만주국의 이상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에서 만주는 오랫동안 항일투쟁 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만주국의 소속도 불분명했다.
만주국은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만주국은 20세기 제국주의의 새 전략이다. 그리고 만주는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고, 사방의 문화요소들이 뒤섞인 융합의 공간인데, 이것은 전후 동북아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동북아 현대 정치, 경제사의 중요한 열쇠이다. 특히 한국에 극단적인 근대 국가의 인자를 전해주었다.
혼합의 무대 만주는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들이 섞여 살았는데, 이곳에서 발흥한 만주족은 한족(중국대륙의 다수민족) 왕조인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웠다. 청조는 오랫동안 한족 내셔널리즘에 물든 학자들에 의해 과소평가되었지만, 역사상 세계최대의 영토를 유지한 나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 비결은 문화적 융합, 즉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적 전통의 결합이었다.
이 전통은 만주국 시대에도 이어졌다.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고인들 외에도, 국제도시 하얼빈의 경우, 유태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 등 50개 이상의 민족, 45개의 언어가 혼재했다. 만주국의 일본인 통치자들이 고안했던 국가이념 ‘오족협화’는 이런 현실을 감안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잊혀져있었지만 1930년대 조선과 일본사회에는 만주 붐이 일어, 도합 120여만(70만의 조선인, 57만의 일본인)이 만주로 갔다. 이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1920-30년대 중국 북부 사람들의 만주행 이주 다음의 기록이었다.
이것은 예술세계에 반영되었다. 한국 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윤봉춘도 만주에서 자랐다. 유치환, 이태준, 한설야, 강경애, 나쓰메 소세키 등 조선, 일본의 예술인 다수가 만주를 방문, 혹은 이주, 만주를 형상화했다. 두 사회에서 만주에 관한 가요도 500개 이상 만들어졌다. 중국 군가의 아버지 정율성,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도 만주에서 컸다. 이들의 작품에 중국, 일본, 러시아, 조선, 서양의 요소들이 뒤섞였다. 제국주의는 예술세계의 확장을 불러왔다.
일본식과 중국식을 섞은 흥아풍의 만주국 정부청사(滿洲國の幻影, p. 77)

신제국주의(Neo-imperialism)의 원형 만주국은 2차 대전 후 등장하는 새 종류의 제국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즉 패권국이 주변부를 독립국 형태로 유지한 채 간섭하는 혁신적 방법이다. 만주사변 이전 일본의 만주경영은 위탁회사 형식으로 침식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한 간접적 방식이었다. 만주에 이권을 갖고 있는 서양 열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열강을 상대로 싸우려는 능력과 의지도 결여했다. 그래서 만주의 군벌을 파트너로 삼아, 남만주철도회사라는 거대한 국책기업을 통해 만주의 투자를 관리했다.
1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이 외친 민족자결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켜,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합병은 어렵게 되었다. 만주국은 이런 상황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독립국 형식은 국제적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었다. 만주국은 1938년 외몽고, 2차 대전중 프랑스의 비쉬정권, 냉전시대 미, 소 진영의 ‘괴뢰국’, 냉전말기 캄보디아 등의 본보기가 되었다. 일방적인 동화정책이 아니라, 주권국 형식, ‘오족협화’, 서양의 패권에 대항하는 동양의 문명담론인 ‘왕도’나 ‘아시아주의’ 이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만주국의 통치는 긴 제국주의 역사에서 세련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국의 주권 형식은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노골적인 특혜의 억제와, (특히 초기에) 만주국 당국이 일본 본국정부에서 다소 자율적인 위치를 갖는 데에도 기여했다. 역사적 가정이지만,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다면, 초기 만주국은 1960년대 백인 거류민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로디지아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이 주는 함의는 주권국가의 형태가 제국주의자들에게 편리함과 불편, 양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현대사의 블랙박스 만주국은 동아시아 현대사와 심각한 관계가 있다. 우선, 만주국은 기시 노부스케를 위시, 태평양전쟁 시 일본정부 내 막강한 인맥을 배출했는데, 그 집단은 50년대 일본 보수정치의 기둥이 되었고, 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와 이후 양국의 유착에 막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만주국은 일본의 1930년대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일본은 만주국으로부터 원자재 상당량을 얻었고, 거대 중화학단지를 건설, 후일 서양과의 대결을 위한 경제적 자립체의 바탕을 마련하고자 했다.
일본은 만주의 인적, 물적 자원을 유린했지만, 역설적으로 1945년 패망 시 중국에 상당한 경제 유산을 남겼다(물론 현재 만주는 동부 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졌다). 만주는 또한 오랜 중국의 국공(國共)내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곳이다. 일제 패망 후 중국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가 재개되었는데, 후자는 만주의 전투에서 승리, 여세를 몰아 남진한다. 전투의 관점에서 만주는 승리의 모루였다.
한국인들에게 만주는 착잡한 장소이다. 항일투사들에게 피난처이자 항전의 무대, 뿌리 잃은 이주민들에게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의 질시와 차별 속의 낯선 땅이었다. 조선조 말 이래,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대토지조사를 거쳐, 끝없이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주했다. 1920년대 중국 민족주의가 일면서 만주의 군벌은 조선인들을 일제의 첨병으로 간주, 박해했었다. 만주국의 건국으로 조선인들의 이주는 탄력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만주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일부는 만주국정부와 군대의 하급 관리, 장교로 있었다. 무엇보다 만주국은 전후 남북한 영도력을 잉태한 무대이다.
6만5000명이 참가한 만주국 건국 10년제의 흥아국민대회(滿洲の記錄, p. 56)

하이 모던 국가의 확산 일제의 만주국 건설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몰락을 불러왔다. 만주를 차지함으로써, 서양에 대항하는 경제블록을 만들었고, 그 범위를 동남아까지 확대, 제국의 범위를 차례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는 자승자박적 조건을 만들었다. 이것은 마침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이른바 메이지국가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만주국은 그 인자를 남겼다. 바로 한국에 극단적 종류의 근대 국가를 전파시킨 것이다. 국가 만들기의 기술도 복제된다. 만주국은 메이지국가의 청사진을 복사했지만, 메이지국가의 도안부터가 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의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만주국 국가형성의 많은 부분이 20세기 냉전의 중심무대 남북한에 전달되었으니, 만주국은 과거와 미래의 국가들을 연결하는 절묘한 고리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만주국에서 한국 근대국가로의 흐름이다. 파시스트적 동원 즉 멸공대회, 경직된 국민의례, 행진, 강연, 영화상영, 운동회, 전단, 표어 등 해방 후 한국사회에 너무도 익숙한 행사들이 기실 만주국 시대에 행해지던 것들이었다. 한국 근대국가는 그 골격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1960, 70년대 이른바 박정희정부 시대에 완성된다. 이것은 90년대 이른바 외환 위기에서 그 한계를 노출, 축소되었으나, 여전히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 만들기에는 대체로 메이지국가, 해방 전 조선총독부, 해방직후 미군정 등 세 자원이 있었으나, 만주국으로부터의 흐름도 간과할 수 없다.
만주국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국민들이 귀가 따갑게 들어온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혹은 발전국가의 모델이다. 양국의 특이성은 사회주의를 방불케 하는 경제계획이외에, 근대(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확신 하에서 자연과 사회를 자로 잰 듯이 배열시킨 하이 모던적 성격이다. 비적 소탕 수준의 위생 정책, 살인적인 수준의 시민동원을 벌였다. 그리고 스포츠와 영화, 음악 등이 국가형성에 수반되었다. 속도와 효율 앞에 문화재와 전통 가옥 등 많은 것이 사라졌다. 속도와 획일성은 양국의 상표였다. 메이지국가와 조선총독부의 정책들이 만주국의 증폭, 강화된 실험을 통해 한국 근대 국가로 유입되었다. 아주 흡사한 성격의 국가들이 시차를 두고 건설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국책 영화와 스포츠는 만주국의 ‘건국’ 이미지를 위해, 한국의 ‘재건’을 위해 기여했다. 만주국에서 ‘건국체조’가, 한국에서는 ‘재건체조’가 보급되었다. 
만주, 역설의 공간 만주국은 혼합과 역설의 세계이다. 어느 연구 분야에도 속하지 않았던, 잔학한 통치와 첨단의 근대를 동시에 지닌 제국이다. 만주국은 새 제국주의 전략이지만, 후자에 제동을 거는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에 극단적인 근대 국가를 복제시켰다. 세계화 현상에서 이런 국가 번식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세계화는 국가의 장벽을 깨고, 그 힘을 무력화시키나, 동시에 자신의 라이벌일 수 있는 후자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이다. 만주국의 그림자는 길다.

한석정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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