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인에겐 불가능한 지위, 활동의 장 제공
분쟁 없는 ‘민족협화’ 표방, 대동아공영권 모델 선전
‘탈오리엔탈리즘’적 국제성으로 만주국 허구성 은폐
한국현대사에서 만주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함의는 무엇일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의 인재 풀 가운데 하나로 세칭 만주 인맥이 거론된 지 오래다. 박 전 대통령 자신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정일권, 백선엽 등 건군의 주역들 역시 그러했다. 눈을 북한으로 돌려보면, 김일성 체제는 만주항일유격대의 맥을 잇는 소위 유격대국가로서 그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남북한 모두 만주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해방 후의 신흥 엘리트로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만주는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만주의 역사적 함의가 과연 이런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먼저 동아시아 규모로 시야를 넓혀보자. 중화학공업화가 진전된 만주는 중국혁명 막바지에 국공내전의 군사적 승리를 가능케 한 전략적 교두보였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공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임표 등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 또 한일 보수지배층의 담합에 의해 성사된 한일회담은 양국을 잇는 만주 인맥의 실체를 드러냈다. 일본 측 대표인 시이나 외상, 막후의 유력자 기시 전수상 등이 모두 만주국 총무청 관료 출신이었다. 만주라는 공간은 한국현대사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현대사의 차원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더 나아가 만주 체험의 문제는 동아시아의 전후체제 형성과 연관된 정치적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2003년 5월, 원로 음악가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서울대 병원에서 타계한 향년 84세의 전봉초. 1965년 서울 바로크 합주단의 창립 멤버로서 한국 실내악의 초석을 다진 저명한 첼리스트다. 전 씨는 해방 직후 고려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의 이계성(전 북한국립교향악단 악장), 피아노의 윤이상과 함께 트리오로 활약했으며 음악협회 이사장과 예총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 한 사람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작고한 향년 83세의 백영호. 1964년 동백아가씨를 작곡해 이미자를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장본인이다. 백씨는 서울이여 안녕, 여로, 동숙의 노래, 추풍령 등 히트곡을 포함해서 무려 4백곡을 남겼고 그 공로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과 옥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만주 벌판을 질주하는 세계 수준의 특급열차 아시아호. 만주 전역의 도시화와 물류, 관광을 이끄는 대동맥의 꽃으로 제국 일본의 새로운 거점 만주국의 근대성을 상징했다.(每日新聞社 編, シリーズ20世紀の記憶: 滿洲國の幻影, 每日新聞社, 1999) |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양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원로인 이 두 인물의 이력에는 두드러진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 만주국, 신경(지금의 장춘)이라는 공간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부산 출신의 백씨는 신경음악학원을 수료했으며 평남 안주 출신의 전 씨는 신경교향악단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징집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는 하지만, 만주(국)에서의 체험이 해방 이후의 활동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두 한국인 음악가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만주 체험이라는 것이 해방 후의 지배체제 형성과 관련되는 정치적 자장을 넘어서 사회문화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 훨씬 더 광범위한 문맥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동아시아 규모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예컨대 동아시아의 스타 이향란을 배출한 만주국의 국책 영화사 만영(만주영화협회)은 한중일 삼국의 전후 영화사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국의 근대성과 국제성 이처럼 한국인의 만주 체험이 동아시아 규모의 전방위적 체험이라고 할 때, 식민지 조선인에게 다가온 만주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기회의 땅이라는 이미지였다. 확실히 꽉 짜인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비해서 만주는 상대적으로 여지가 있는 공간이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망명한 소위 백계 러시아인들에게 하얼빈이 그러했듯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만주는 일종의 탈출구라는 면모를 갖고 있었다.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 전봉초를 비롯해서 김동진, 안병소, 이재옥 등 조선인 음악가들은 신경교향악단 내에서 현악기 파트를 중심으로 소그룹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였다. 만주국은 이들이 직업음악가로 활동할 수 있는 귀중한 무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2002년에 83세로 별세한 지휘자 임원식이 하얼빈교향악단의 콘서트마스터가 경영하는 하얼빈 제일음악학교에 입학했던 것도, 유복하지 못한 의주 선교사 가정 출신의 음악도였던 그에게는 어쩌면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이렇듯 식민지 조선인에게 만주가 기회의 땅일 수 있었던 것은 만주가 제국의 새로운 중심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망? 만주국은 일본이라는 제국의 근대성과 국제성을 과시하기 위한 쇼 윈도우였던 것이다. 우선 만주국의 근대성은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대륙특급 아시아호에 의해 대변되었다. 에어컨, 전망차, 식당차를 갖춘 이 유선형의 초고속열차는 직경 2m 육중한 바퀴를 달고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드넓은 만주 평원을 질주했다. 일본 철도의 특급 쓰바메(도쿄-고베)가 시속 70㎞, 조선 철도의 특급 히카리(부산-신경)가 50㎞정도였던 1934년의 일이다. 전 만철 이사가 패전 후 국철 총재로 취임해 건설계획을 주도했던 신칸센은 특급 아시아호의 유산인 셈인데, 그만큼 아시아호는 일본 철도기술의 세계적 수준을 과시한 이정표였다. 그것은 만주 전역의 도시화와 물류, 관광을 이끄는 대동맥의 꽃으로서 제국 일본의 새로운 거점 만주국의 근대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물론 아시아호가 내달린 만철의 철로는 조선인, 중국인 쿨리의 피와 땀에 의해 부설된 것이었고, 만철은 관광과 물류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력의 수송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만큼, 만주국의 근대성은 그 이면에 가혹한 식민주의를 숨기고 있었다. 애당초 세계사에서 식민지 없는 근대가 과연 가능하기나 했던가? 만주국이 과시한 근대성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성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근대화의 도상에 있던 만주국은 식민지 조선인에게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지위나 활동의 장을 제공할 환상의 무대장치였다.
식민지 조선인에게 만주가 지닌 또 다른 매력은 그 국제성에 있었다. 괴뢰 만주국이 내건 공식 슬로건이 바로 민족협화의 왕도낙토였다. 서양의 패도정치에 맞선 동양의 왕도정치가 구현될 공간이 바로 만주국이었고 거기에서는 왕도의 발현으로서 민족분쟁 없는 민족협화가 표방되었다. 역내 모든 민족이 조화롭게 협동하는 협화의 낙원 만주국은 서양의 세계지배에 맞설 대동아공영권의 모델로 선전되었던 것이다. 비록 민족자결을 서양 근대 국민국가의 원리라고 부정해 버리는 자기모순 위에서 가능했던 일이지만, 만주국은 새로운 탈오리엔탈리즘적 국제성에 의해 그 허구성을 은폐하려 했다.
국제도시 하얼빈의 중앙대로(키타이스카야)를 거니는 러시아인들. 몰락한 서양인과 그들에게 돈을 뿌려대는 신흥 동양인으로 대비된 도시, 하얼빈은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을 뒤엎는 체험 공간, 관광의 메카로서 자리 잡았다.(每日新聞社 編, シリーズ20世紀の記憶: 滿洲國の幻影, 每日新聞社, 1999) |
국제도시 하얼빈이야말로 그 국제성의 상징적 존재였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국제도시 상하이가 모자이크형 도시인 데 반해 하얼빈은 멜팅팟형 도시로 평가된다. 즉 서로 다른 민족들이 모여 살면서도 가급적 뒤섞이지 않았던 상하이와는 달리, 개척자들의 도시 하얼빈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신참자로서 용광로처럼 뒤섞이는 공간이었다. 특히 백계러시아인의 존재가 하얼빈의 국제성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만주국의 주요도시에서 운행된 순환관광버스 가운데 하얼빈만이 유일하게 일본인 가이드를 쓰지 않았다. 러시아인 여성에게 관광가이드를 맡김으로써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여행객들에게 만끽하게 하려는 일본 상술의 결과였다. 밤거리의 카바레 등에서도 러시아인 여성 댄서의 인기는 발군이었다. 몰락해 버린 서양인과 그들에게 돈을 뿌려대는 신흥 동양인의 대비. 하얼빈은 기존의 오리엔탈리즘을 뒤엎는 체험의 공간으로 만주 관광의 메카로서 자리 잡았다.
귀환과 정착, 디아스포라의 역사 만주국의 국제성에는 인종갈등 없는 이상사회의 모델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려는 목적 아래 일본에 의해 인위적으로 관리된 측면도 있다. 예컨대 관동군은 하얼빈에서 극동 유태인 대회를 세 차례나 개최해 유태인의 자금과 외교력을 활용하려 한 바 있다. 그렇지만 하얼빈의 형성과정에서부터 실재했던 국제성 자체를 부정할 수 없듯이, 만주국이라는 일종의 이주자 국가가 지닌 국제성의 측면이 국외자들에게 큰 흡인력으로 작용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식민지 시기 한국인의 만주 체험을 귀환자, 그것도 그 상층의 경험에 국한해서 고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체험은 항일투쟁이라는 극적인 항거의 절규를 포함하며, 무엇보다 이주자의 대다수를 점한 농민들에게는 지난한 노동, 각종 민족차별, 그리고 전시, 준전시체제하의 생명의 위협으로 점철된 고난의 연속이었다. 간도 등지에 뿌리내린 이들의 삶은 해방 이후에도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의 삶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귀환자 하층과 만주 정착자들의 삶이야말로 한국인의 만주 체험을 살피려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한국인의 만주 체험이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즉 이산 체험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디아스포라를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소수파로 살아가는 민족적 공동체사회라고 정의할 경우,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체험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 체험이었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총인구의 10% 전후가 디아스포라 상태에 직면해야 했던, 지금도 그러한 한민족의 역사에서 디아스포라가 점하는 중요성은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하와이, 일본, 러시아, 브라질 등지로 이어진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그동안 너무도 경시되거나 무시당해 왔다.
식민지 치하에서 만주로 이주의 길을 떠난 조선인들은 병합 이래 일본신민이라는 법적 지위를 지닌 채 일본영사관의 관할 아래 있다가 괴뢰 만주국이 수립된 뒤로는 만주국 국민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만주국 국민과 일본신민의 틈새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이들은 8.15 이후에 또 다시 사분오열되었다. 만주 정착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남한 귀환자는 대한민국 국민, 북한 귀환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이 되었다. 한국인이란 과연 누구인가? 그 정체성의 혼선은 지금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고려교향악단의 윤이상, 이계상, 전봉초 트리오가 겪은 한국현대사의 굴곡이야말로 해방을 전후한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체험, 그것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한국인의 만주 체험은 중국 화교, 동남아시아 화인, 이주 오키나와인 등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겪었던 좀 더 보편적인 디아스포라 체험의 일환이다. 만주국이 내걸었던 저 민족협화라는 이념을 이제 제국의 슬로건이 아니라 일상의 레토릭으로 살려낼 평등과 평화의 동아시아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만주의 역사는 이에 대한 진지한 응답을 모색하기 위한 화두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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